그날 오후, 산모퉁이 빵집에는 유난히 달콤하고 따뜻한 공기가 감돌았다. 지우는 갓 구워져 나온 에그타르트를 식힘망에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처럼 정성껏 반죽하고 구워냈지만, 오늘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허전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쌀쌀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어제 뉴스에서 본 쓸쓸한 소식 탓인지, 알 수 없는 먹먹함이 그녀의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지우 씨, 안녕하세요?”
딸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와 함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스물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한 손에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휠체어를 밀고 들어섰다. 김복례 할머니와 손녀 수아였다. 복례 할머니는 이 빵집의 가장 오래된 단골손님 중 한 분이셨다. 어릴 적부터 손녀의 손을 잡고 와 이 빵집의 빵을 드셨고, 지우가 처음 이 빵집을 물려받았을 때도 가장 먼저 찾아와 따뜻한 격려를 건넸던 분이셨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할머니의 기억은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손녀 수아가 할머니를 모시고 오는 날이 더 많아졌다. 할머니는 지우를 알아보는 듯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깊은 안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할머니, 오늘은 뭘 드실까요? 팥빵? 소보로?” 수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의 눈은 빵 진열대 위를 훑었지만, 초점은 흐릿했다.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그저 먼 곳을 응시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수아의 얼굴에는 작은 그늘이 졌다. 지우는 말없이 따뜻한 차 두 잔을 내어 테이블에 놓았다.
“할머니, 제가 팥빵 좋아하시는 거 알죠? 이거 하나 드셔보실래요?” 수아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팥빵 하나를 집어 들었지만,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건… 내가 찾던 게 아니야…” 할머니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았다. 씁쓸함이 수아의 입술에 번졌다.
그때, 지우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이 빵집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그리고 복례 할머니가 가장 활기 넘치던 시절에 유독 즐겨 드셨던 빵. 지금은 품목에서 사라진, 투박하지만 깊은 맛을 가진 ‘옛날 밤식빵’이었다. 큼지막한 밤들이 콕콕 박혀 있고, 겉은 바삭하면서 속은 촉촉한, 그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빵.
“할머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특별한 빵을 하나 구워드릴게요.”
지우는 망설임 없이 발효 중인 반죽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굽는 밤식빵이었지만, 손은 기억하고 있었다. 반죽을 능숙하게 썰어 펼치고, 큼지막하게 으깬 밤을 아낌없이 채워 넣었다. 틀에 넣어 오븐에 밀어 넣자, 뜨거운 열기가 순식간에 빵집을 감쌌다. 익숙한, 그러나 잊고 지냈던 밤식빵 특유의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아만이 그 향기를 감지했다. “어? 지우 씨, 무슨 빵 구우세요? 정말 좋은 냄새 나요.” 하지만 이내 그 향기는 빵집 구석에 앉아있던 할머니의 코끝까지 닿았다. 할머니는 고요하던 몸을 움직여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흐릿했던 눈동자에 미미한 흔들림이 일었다.
“밤… 밤… 냄새다…” 할머니의 입술에서 작게 터져 나온 말에 수아가 놀라 지우를 돌아보았다. 지우는 오븐 안에서 노릇하게 익어가는 밤식빵을 꺼내 식힘망에 올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그 빵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고 포근해 보였다.
“할머니, 이거 기억나세요?” 지우가 밤식빵 한 조각을 접시에 담아 할머니 앞에 내밀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빵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을수록 달콤하고 고소한 밤의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랜 안개를 걷어낸 듯, 맑은 빛이 돌아왔다. “어머… 이 밤식빵… 여보… 당신이 제일 좋아했던 밤식빵이잖아… 주말마다 이걸 사다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먹었는데… 이 맛을… 내가 어떻게 잊었을까…”
할머니의 입에서 터져 나온 또렷한 말에 수아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한참을 잊고 지내셨던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할머니가 이렇게나 생생하게 기억해내시다니. 빵 조각을 든 할머니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더없이 행복하고 평온해 보였다.
지우는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빵 하나가, 잊혀가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 순간, 산모퉁이 작은 빵집 안에는 그 어떤 거창한 기적보다도 따뜻하고 위대한 기적이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빵 한 조각을 다 드신 후, 다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지만, 그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수아는 지우의 손을 꼭 잡았다. “지우 씨, 정말 감사해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지우는 말없이 수아의 손을 마주 잡았다. 이 빵집을 지키는 이유,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빵을 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누군가의 가슴속에 잊혀가던 따뜻한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작은 위로와 행복을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산모퉁이 작은 빵집이 매일 빚어내는 소박하지만 가장 위대한 기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