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이미 짙은 남색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늦가을의 마지막 자락, 겨울의 매서운 숨결이 문틈으로 스며들어 실내의 온기마저 위협하는 시간이었다. 현우는 뜨거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밖을 내다봤다. 그의 시선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정원의 라일락 나무에 머물렀다. 한때 보랏빛 향기를 흩뿌리며 온 집안을 감쌌던 그 나무는 이제 그저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정물화 같았다.
쓸쓸함이 가슴 한구석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지난 몇 주간, 현우는 유난히 계절의 변화를 아리게 느꼈다. 시간이란 이렇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일까. 젊음의 활기, 한때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꿈들, 그리고 곁을 지키던 소중한 존재들. 모두 라일락의 꽃잎처럼 흩어지고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창턱 위에 그림자처럼 스르륵 나타난 것은. 검은 털이 밤의 어둠에 녹아드는 듯한, 그러나 두 눈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길고양이, 그림자였다. 그녀는 언제나 그랬듯 소리 없이 나타나 현우의 불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만히 앉아 현우를 응시했다.
“왔구나, 그림자.”
현우는 차가 식은 줄도 모르고 중얼거렸다. 그림자는 대답 대신 가느다란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그녀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 같았다. 현우는 그녀가 자신의 쓸쓸함을 읽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정원이 텅 비어가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사라지는 계절이야.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아.”
그림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윽고 작은 목소리가 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늘 그렇듯, 그 소리는 마음의 울림처럼 다가왔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는 것뿐입니다. 어둠 속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는 시간이지요.”
현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까? 난 그저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느껴져. 꽃이 지고, 잎이 떨어지고, 새들도 떠나가고. 마치 나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
그림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턱을 따라 현우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털이 차가운 유리창에 스치는 소리가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끝이라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일 때가 많습니다. 겨울은 땅을 얼어붙게 하지만, 그 속에서 씨앗은 더 단단해지고 기다림을 배웁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현우는 그녀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래전 잊었던 기억 하나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장난감 기차가 고장 나 산산조각 났을 때의 절망감. 그리고 아버지가 그 조각들을 밤새도록 다시 붙여주며, “새로운 길을 달릴 준비를 하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던 기억. 그때의 기차는 예전처럼 완벽하진 않았지만, 더 단단해진 이음새와 아버지가 더한 작은 장식들로 인해 더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었다.
그림자는 현우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랐다. 따뜻한 체온이 바지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녀는 현우의 손등에 제 머리를 살짝 비볐다. 그 작은 움직임이 거대한 위로처럼 느껴졌다.
“꽃이 다시 필 수 있는 것은, 지난 계절의 꽃잎들이 땅으로 돌아가 영양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당신 안에 남아있는 기억과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체는 변했을지언정, 그 힘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현우는 천천히 그림자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털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놀랍도록 따뜻했다.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 잊고 있던 소중한 것을 다시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더 깊이 뿌리내리는 시간이라…”
그는 그림자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정원의 라일락 나무는 여전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현우의 눈에는 이제 그 가지들 속에 숨겨진 생명의 잠재력이 보였다. 차가운 흙 아래, 견고한 뿌리들이 묵묵히 다음 봄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마치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오랜 희망처럼.
그림자는 현우의 손에 얼굴을 비비며 작게 골골거렸다. 그 낮은 울림이 현우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 얼어붙었던 감정들을 녹이는 듯했다. 겨울은 올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덮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 겨울의 품 안에서, 새로운 생명은 조용히 자신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현우도 이제 그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말없이 다가와, 잊었던 온기를 일깨워주는 작은 그림자가 있으니 말이다.
현우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차가운 어둠 속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 밤의 어둠 속에도 분명, 찬란한 아침의 씨앗이 숨 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