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겨울의 묵직한 침묵을 뚫고, 마침내 봄이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를 가지고 세상에 도래했다. 차가운 바람결에 실려 오던 혹한의 기운은 어느새 부드러운 속삭임으로 변하여, 창호지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할머니 이금옥의 뺨을 간지럽혔다. 고요한 한옥 마루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던 금옥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 바람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맘때가 되면, 할머니의 가슴 한켠에는 늘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작은 희망의 씨앗이 움트곤 했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봄처럼 찬란했던 딸, 연희의 얼굴이 바람결에 실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헤어진 그 날, 연희는 열여덟, 금옥 할머니는 서른이었다. 젊은 날의 금옥이 온 몸으로 붙들었던 희망은 나이가 들수록 옅어지는 듯 보였으나, 매년 봄이 오면 다시금 푸른 새싹처럼 고개를 들었다.
봄날의 속삭임
“할머니, 또 봄바람 쐬고 계세요?”
사랑채 문이 열리고, 스물여섯 살의 건장한 손자, 지훈이 들어섰다. 그는 할머니의 유일한 혈육이자, 지난 십여 년간 할머니의 묵은 한을 풀어주기 위해 전국을 헤매고 다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지훈은 할머니 곁에 조용히 앉아 어깨를 주물렀다. 그의 손에는 낡은 보자기에 싸인 작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지훈아, 어서 오렴. 바람이 참 좋구나. 꼭 연희가 곁에 와서 속삭이는 것 같아.”
금옥 할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뒤에는 감출 수 없는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지훈은 그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조용히 꾸러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할머니, 오늘… 좀 할 얘기가 있어요.”
지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진중했다. 금옥 할머니는 지훈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무언가 평소와 달랐다. 그녀의 심장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제가 지난달에 대구에 다녀왔잖아요. 거기서 어르신 한 분을 만났습니다. 오래된 복지원에 계시는 분인데, 피난 시절 기억이 아주 또렷하신 분이셨어요.”
오래된 기억의 조각
지훈은 말을 잇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 할머니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루를 스쳐 가는 봄바람이 잠시 멈춘 듯, 세상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그 분이… 아주 오래 전, 피난길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고 했습니다. 열여덟 살 남짓한 여자아이인데, 어미를 잃고 홀로 떠돌고 있었다고요. 그 아이는 틈만 나면 작은 나무 조각으로 무언가를 깎았다고 했습니다. 특히 참새 모양을 자주 만들었대요.”
지훈의 말에 금옥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참새. 연희가 가장 좋아하던 새였다. 연희는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운 솜씨로 작은 칼을 들고 나무 조각을 깎았다. 특히 참새 모양은 그녀의 특기였다. 어디를 가든 손에서 놓지 않던, 작은 나무 참새들.
“그 어르신이… 이 모든 기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이걸 가지고 계셨다고 합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풀었다. 그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손바닥만 한 낡은 나무 조각이 있었다. 투박하지만 섬세하게 조각된 참새 한 마리. 날개 부분은 마모되어 닳아 있었고, 한쪽 눈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금옥 할머니의 두 눈에는 기어이 굵은 눈물이 맺혔다.
“연희야….”
할머니의 떨리는 손이 나무 참새를 향해 뻗었다. 마침내 그 작은 조각이 그녀의 손에 닿았을 때, 할머니의 몸은 감당할 수 없는 전율로 흔들렸다. 이 촉감, 이 닳아버린 나무결. 수없이 만지고 또 만져 기억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 촉감이었다. 연희의 손길이 남아있는 듯한, 그 작은 참새.
“이 뒷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어요. ‘엄마 보고 싶어’ 그리고… ‘봉선화’.”
지훈은 목이 메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는 그 작은 나무 참새를 뒤집었다. 닳아 희미해졌지만, 분명히 새겨진 글자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엄마 보고 싶어’. 그리고 ‘봉선화’. 봉선화는 연희의 태명이었다. 금옥 할머니만이 아는, 그들 모녀만의 비밀스러운 이름.
새로운 길의 시작
할머니의 어깨는 한없이 떨렸다. 오랜 세월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가슴 속을 맴돌던 응어리가 단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나무 참새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딸의 흔적, 아니, 살아있다는 희미한 증거가 마침내 그녀의 손에 닿은 순간이었다.
“그 어르신 말씀이, 그 아이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북쪽으로 올라갔다고 했습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 아이가 분명히 ‘서울 근처에 있는 이모 집을 찾아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요.”
지훈은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슬픔과 함께 놀라운 생기가 스치는 얼굴이었다. 70년을 기다린 소식. 어쩌면 아직도 희미한 실마리일 뿐이지만, 이 작은 참새 하나가 그 모든 기다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봉선화… 우리 연희… 살아 있었구나….”
금옥 할머니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섞여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지훈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할머니의 고통을, 그녀의 희망을 지켜보며 함께 싸워온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 이제 시작이에요. 실마리를 찾았으니, 더 힘내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연희 어머님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훈은 굳은 목소리로 다짐했다. 봄바람은 다시 마루를 스치며 지나갔다. 이번에는 더 이상 쓸쓸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70년이라는 긴 시간을 건너, 마침내 희망의 소식을 전해 온 따뜻한 바람이었다. 금옥 할머니는 작은 나무 참새를 든 채 멀리 펼쳐진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그곳 너머 어딘가에서, 그녀의 딸이 따뜻한 봄날을 맞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희망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이제 막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