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은 오래된 지도 위에 무심하게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응시했다. 사진 속 윤서는 시간이 빚어낸 흔적을 얼굴에 새기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강준이 기억하는 스무 살의 윤서와 다름없이 깊고 아련했다. 사진 배경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작은 서점이었다. ‘고요한 책방’이라는 이름이 고즈넉하게 새겨진 간판 아래,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강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952화에 걸친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추적의 끝이 드디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오랜 운전 끝에 강준은 간판 하나 겨우 걸린 작은 건물 앞에 섰다. 낡은 목재 문, 바랜 유리창 안으로 빼곡히 들어찬 책들이 보였다. 사진 속 윤서가 서 있던 그 자리였다. 햇살이 비스듬히 쏟아지는 오후, 서점 앞에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익숙한 풀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강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가슴을 짓눌러왔던 무게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한, 동시에 더 큰 무게가 덮쳐오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문을 열자, 낡은 책과 나무 냄새, 그리고 은은한 커피 향이 강준을 맞았다. 삐걱이는 마룻바닥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서점은 아담했지만 책장마다 책들이 질서정연하게 꽂혀 있었고, 창가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는 숨죽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윤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듯했다. 책장 사이를 거닐다 그는 한 코너에 다다랐다. 시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윤서는 스무 살에도 시를 사랑했고, 특히 비 오는 날이면 낡은 시집을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그때, 계산대 뒤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강준은 고개를 돌렸다. 칠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안경 너머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였다. 윤서는 아니었다. 강준의 심장이 한순간 철렁 내려앉았다가 다시 무겁게 뛰기 시작했다. 실망감과 동시에, 어쩌면 이분이 윤서의 흔적을 아는 유일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교차했다.
“저… 실례지만 이 서점의 주인분이신가요?” 강준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손에 든 사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할머니는 강준의 시선을 따라 그의 손에 들린 사진을 보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치 잊고 지냈던 오래된 퍼즐 조각을 맞추려는 듯했다. “주인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그저 이 공간을 지키는 사람이지요. 왜 그러시는지?”
강준은 사진을 조심스럽게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사진 속의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윤서… 윤서 씨입니다. 여기서 일하셨던 게 맞는지요?”
할머니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슬픔인지, 놀라움인지, 아니면 연민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사진 속 윤서의 얼굴을 한참 동안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윤서… 그 아이라면 한 달 전에 떠났어요.”
강준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한 달 전? 그는 거의 털썩 주저앉을 뻔했다. 또다시 빗나간 것이다. 952화에 걸쳐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달 차이로 또다시 그녀를 놓쳤다니.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떠났다고요? 어디로… 어디로 갔습니까?”
할머니는 강준의 간절한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어디로 갔냐구요… 음… 그 아이가 떠나면서 이것 좀 전해달라고 했어요. 혹시라도 저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지요.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아마 알 거라고 했어요.”
할머니는 계산대 서랍을 열고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강준의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강준은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었다. 찢어질 듯한 봉투 안에는 손으로 직접 쓴 편지와 함께, 작은 종이 한 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
편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강준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강준아, 너는 언젠가 나를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어쩌면 너무 늦게, 어쩌면 너무 일찍. 하지만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강준은 숨을 헐떡였다. 그의 이름이, 윤서의 손글씨로 쓰여 있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윤서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말없이 뜨거운 차 한 잔을 내밀었다.
강준은 편지를 마저 읽었다. 윤서는 그가 자신을 찾아올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서점을 정리하고 홀로 떠난 이유도 편지 속에 희미하게 암시되어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더 멀리, 더 깊은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남아 감당해야 할 마지막 시련이 있다고 했다.
편지의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쩌면 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나를 찾아 헤맨 그 긴 시간만큼, 나 역시 너를 그리워했음을 알아주길 바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아. 내 삶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제 너에게 마지막 힌트를 남길게. 네가 늘 찾던 그곳,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벚나무 아래서…
강준의 손이 떨리며 편지 속에 접혀 있던 작은 종이 조각을 펼쳤다. 그곳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한밤의 꿈처럼 사라진… 시간의 숲.’
강준은 고개를 들었다. ‘한밤의 꿈처럼 사라진… 시간의 숲’. 그는 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어린 시절 윤서와 함께 읽었던 동화책 속에 나오는 가상의 장소였다. 하지만 그 동화책은 그들의 특별한 비밀 장소, 그들만의 ‘시간의 숲’을 지칭하는 암호이기도 했다. 그곳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벚나무 아래, 그들의 추억이 시작된 곳. 한때는 작은 오솔길이었던 그곳에, 지금은 무성한 숲이 우거져 있었다.
할머니는 조용히 강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윤서는…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늘 당신을 이야기했습니다. 강준 씨라면, 기어이 자신을 찾아낼 거라고요.”
강준은 편지를 품에 안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절망과 희망, 그리고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뒤섞인 감정들이 그를 압도했다. 윤서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했고,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할 마지막 시련은 무엇일까? ‘한밤의 꿈처럼 사라진… 시간의 숲’. 그곳에서 그는 과연 윤서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그림자만 붙들게 될까. 강준은 낡은 서점 문을 나서며 결심했다. 이번이야말로, 그의 20년 넘는 추적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