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훈은 낡은 창고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겨우 손바닥만 한 오래된 수첩을 손에 쥐고 있었다. 손끝에서 스며드는 뼛속 시린 한기가 그의 지친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지만, 그의 눈은 그 한 조각의 종이 위에서 한순간도 움직이지 않았다. 973번째 밤, 혹은 낮. 그가 은서를 찾아 헤맨 수많은 시간 속에서, 이토록 작은 단서가 이토록 거대한 희망을 안겨준 적이 있었던가.
“은서야…”
메마른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이름은 마치 사막에 뿌려진 한 방울의 물처럼 허공으로 흩어졌다. 수첩 속에는 십수 년 전, 은서가 즐겨 그렸던 작은 들꽃 그림과 함께,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글씨로 적힌 단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북극성 아래, 잊혀진 시간의 문을 열다.’
새로운 새벽의 그림자
그는 지난밤, 폐쇄된 제약회사의 비자금 장부를 추적하다 우연히 이 수첩을 발견했다. 은서가 갑자기 사라진 후, 그녀의 모든 흔적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었다. 지훈은 그녀의 가족, 친구, 심지어 그녀가 좋아했던 카페의 바리스타까지 수없이 만나고 쫓았지만, 모두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그 아이는 증발했습니다.”
하지만 이 수첩은 달랐다. 분명 은서의 필체였다. 그녀의 그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에게만 알려주었던, 비밀스러운 암호 같은 문장이었다. ‘북극성 아래’는 그들이 어릴 적 함께 보던 별자리 중 유일하게 흔들리지 않는 별을 의미했고, ‘잊혀진 시간의 문’은 그녀가 한때 탐독했던 고대 신화 속 시간의 문을 은유하는 표현이었다.
지훈은 벌떡 일어섰다. 몸의 피로 따위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처음 탐정 일을 시작했을 때처럼 뜨겁게 고동쳤다. 이 문장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은서가 자신에게 보내는, 혹은 언젠가 발견될 것을 바라며 남겨둔, 마지막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는 곧장 자신의 낡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는 수백 장의 사라진 사람들의 사진과 자료, 그리고 은서의 빛바랜 사진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은서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맑은 눈빛, 해맑은 미소, 바람에 흔들리던 긴 머리카락. 그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은서야, 내가 갈게. 이제 정말 가까워진 것 같아.”
과거의 메아리, 현재의 단서
지훈은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모든 자료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북극성 아래’라는 키워드는 그가 조사했던 은서의 실종과 관련된 몇몇 미스터리한 장소들과 겹쳐지는 부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은서가 봉사활동을 나갔던 외딴 산골 마을 근처의 폐허가 된 천문대. 그곳은 지도상으로도 북극성이 가장 잘 보이는 곳 중 하나였다.
그 천문대는 20년 전 미스터리한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후 아무도 출입하지 않는 금지 구역이 되었다. 하지만 지훈은 몇 년 전 그곳을 조사하려다 알 수 없는 방해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었다. 그때는 그 방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제 수첩의 단서와 연결 지어보니 모든 것이 하나의 실타래처럼 엮이는 느낌이었다.
밤늦게까지 자료를 분석하고, 지도를 펼치고, 예전 기록들을 대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잊혀진 천문대 아래,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작은 오솔길을 발견했다. 그 오솔길은 오래된 숲 속으로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폐쇄된 광산의 입구가 있었다. 그 광산은 일제 강점기 때 은을 채굴하던 곳이었지만, 오래전 폐광된 후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잊혀진 시간의 문을 열다.’
지훈의 머릿속에서 은서의 글귀가 울렸다. 폐쇄된 광산. 그곳은 마치 시간의 문처럼, 외부와 단절된 공간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은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도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얼어붙은 숲을 뚫고
다음날 새벽, 지훈은 최소한의 장비와 무기만을 챙겨 천문대가 있는 산으로 향했다. 가파른 산길은 밤새 내린 비로 질척거렸고,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러나 지훈의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수백 번, 수천 번 이 길을 상상해 왔고, 이제 그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오래된 천문대 터는 온통 잡목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불에 타다 남은 철골 구조물들이 을씨년스럽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덩이들이 곳곳에 파여 있었다. 그는 수첩에 적힌 그림과 지도를 대조하며 오솔길을 찾아 나섰다.
수풀을 헤치고, 가시덤불을 피하며 한참을 걸었을까. 마침내 그는 흙더미와 바위로 뒤덮인 작은 입구를 발견했다. 짐승의 길이라도 될 법한 좁은 틈새였다. 이곳이 바로 은서가 말했던 ‘잊혀진 시간의 문’으로 향하는 길일 것이라는 확신이 그의 온몸을 전율시켰다.
그는 휴대용 랜턴을 켜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설수록 공간은 점점 넓어졌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고, 천장과 벽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오래된 나무 지지대들은 위태롭게 서 있었고, 그의 발아래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부서진 광산 레일의 잔해들이었다. 이곳은 분명 폐광된 은광이 맞았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도구들과 쓰러진 수레들이 보였다. 벽면에는 광부들이 새겨놓은 것으로 보이는 낙서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수십 년, 아니 어쩌면 백 년도 넘는 세월의 흔적들이었다.
미지의 심연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그는 갑자기 정지했다. 그의 랜턴 불빛이 닿는 곳에, 낡은 나무 문이 서 있었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문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문틈으로는 희미한 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심장을 울린 것은, 그 문 위쪽에 새겨진 작은 문양이었다.
어린 은서가 자신의 수첩에 그렸던, 바로 그 들꽃 문양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다시 한번, 희미하게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이번에는 ‘탐정님, 마침내 오셨군요.’
지훈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은서였다. 은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토록 오랫동안, 이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자신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녹슨 쇳덩이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 눅눅한 흙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책 냄새 같기도 하고, 어딘가 익숙한, 은서에게서 나던 향기와도 같았다.
지훈은 문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에는 광산과는 전혀 다른, 깔끔하게 정돈된 통로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벽면에는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 은서의 그림이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 그림부터, 청소년기의 습작들, 그리고 자신이 기억하는 그녀의 마지막 그림까지. 마치 그녀의 삶의 기록을 벽에 새겨놓은 것 같았다.
통로 끝에는 다시 하나의 문이 있었다. 그 문은 이전의 투박한 문과는 달리, 현대식으로 만들어진 철문이었다. 문 위에는 작은 인터폰이 달려 있었다. 지훈은 망설였다. 973화에 걸친 그의 여정이, 이 문 뒤에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미로의 시작일까.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낡은 스피커에서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셨군요, 강지훈 탐정님. 오시리라 믿었습니다. 오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었다. 변해버린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 담긴 체념과 희미한 희망은 은서의 것이 분명했다. 지훈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드디어, 마침내, 그가 찾던 진실의 문이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차올랐다. 이 문 뒤에 있는 은서는, 과연 그가 기억하는 그 은서일까? 아니면 지난 세월이 그녀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바꿔놓았을까?
문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그 바람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첫사랑이 남긴 마지막 그림들을 바라보며 굳게 선 채로, 빛이 쏟아져 나오는 문 안쪽을 응시했다. 은서, 그녀는 과연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왜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숨어 지내야만 했던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