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피아노가 부르는 노래 – 제959화

오후 세 시의 햇살은 낡은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 먼지 가득한 공기 속에서 은빛으로 부유하는 작은 입자들을 춤추게 했다. 그 빛줄기 끝에 놓인 낡은 피아노는 마치 오랜 비밀을 간직한 거대한 관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건반 위를 무심히 훑는 하윤의 손가락은 피아노가 내뿜는 미세한 나무 향기와 시간의 무게를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할머니가 떠나신 지 벌써 5년. 이 낡은 집에 홀로 남아 피아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때로는 위로였고, 때로는 족쇄였다. 삐걱이는 마루와 오래된 벽지 사이에서 할머니의 웃음소리와 잔소리가 맴도는 것 같아 떠날 수도, 버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낡아빠진 집은 수리할 엄두도 나지 않았고, 밀린 공과금 고지서는 매달 그녀를 짓눌렀다. 이 피아노를 포함해 모든 것을 처분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하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이 피아노의 상아빛 건반 위를 맴돌다, 익숙한 할머니의 연주곡을 더듬더듬 짚어갔다. 어설프게 시작된 멜로디는 삐걱이는 페달 소리와 섞여 애처롭게 울렸다. 음 하나하나에 할머니와의 추억이 박혀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 이 피아노 앞에서 조그만 의자에 앉아 할머니의 긴 손가락이 건반 위를 유영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이 피아노는 노래를 부른단다. 아주 오래된, 비밀스러운 노래를.”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도 여전히 모르지만, 피아노를 볼 때마다 그 알 수 없는 말이 그녀의 마음 한구석을 자꾸만 흔들었다. 팔아야 할까. 팔아버리면, 할머니의 노래는 영영 사라지는 걸까.

그때였다. 딩동, 딩동. 현관 벨 소리가 적막을 깨고 울렸다. 하윤은 놀라 연주를 멈췄다. 이런 낡은 집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집안일을 돕는 아주머니도 오늘은 오지 않는 날이었다. 혹시 채권추심원인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다가갔다. 작은 틈새로 밖을 보니,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붉은색 코트를 입고,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다. 꽤 나이가 있어 보였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하윤이 문을 조금 열자, 여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을 꿰뚫는 듯했다. “하윤 씨 되시죠? 할머니께서… 김연희 할머니께서 계셨던 이 집이 맞나요?”

하윤은 경계심을 풀지 않고 물었다. “누구신데요?”

여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은성 미술관, 특별 전시 기획팀장 윤은성’이라고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윤은성입니다. 제가 실은 할머니의 지인이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인연이죠.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피아노에 대해 여쭤볼 수 있을까요?”

피아노. 그 단어에 하윤의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졌다. “피아노요? 할머니와 어떤 관계신데요?”

은성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며 집안을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은 곧장 거실 한가운데 놓인 낡은 피아노로 향했다. 마치 오래 헤어진 연인을 만난 듯, 애틋함과 그리움이 섞인 눈빛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요… 거의 반세기 만인가요.” 그녀는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건반을 쓰다듬었다. “할머니께서는 이 피아노를 ‘나의 노래’라고 부르셨죠.”

하윤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가 했던 ‘피아노는 노래를 부른다’는 말과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은성은 하윤을 보며 말했다. “하윤 씨 할머니는… 사실 유명한 작곡가이셨습니다. 물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요. 당신의 삶을 담은, 단 하나의 곡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바치셨죠. 그 곡이 바로 이 피아노에 깃들어 있습니다.”

하윤은 믿을 수 없었다. 평생 작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소박하게 사셨던 할머니가 작곡가라니? 더구나 ‘유명한’이라는 수식어는 도무지 매치되지 않았다. “저희 할머니는… 그냥 동네 할머니셨는데요.”

“그게 할머니의 선택이었어요. 세상의 잣대와 명성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진정한 예술만을 추구하셨죠. 제가 어릴 적, 할머니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곡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고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혹시 그 곡이 사라질까 염려되어 찾아왔습니다.” 은성은 가방에서 낡은 악보 한 장을 꺼냈다. “이건 할머니가 예전에 제게 주셨던 악보 조각입니다. 미완성된 파편이지만, 이 안에 그 곡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해요.”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악보를 받아들었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멜로디가 듬성듬성 그려져 있었다. “이게… 할머니의 곡이라고요?”

“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할머니께서는 늘 ‘진정한 노래는 건반 아래, 피아노의 심장에 숨겨져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특정 음을 연주하면, 피아노가 스스로 길을 보여줄 거라고요.”

그녀의 말이 하윤의 심장을 뛰게 했다. 피아노가 노래를 부른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하윤은 당장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다. 낡은 악보를 건반 위에 올려놓고, 은성이 가리키는 파편적인 멜로디를 조심스럽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잊고 있던 할머니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했다.

첫 음. 두 번째 음. 멜로디가 이어질수록 하윤의 몰입은 깊어졌다. 그런데, 악보에는 없는 특정 음에서, 피아노가 미세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꼈다. 쿵 하는 작은 울림과 함께, 피아노 몸체에서 아주 희미한 삐걱임이 들렸다. 은성이 다가와 하윤의 손가락이 멈춘 건반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이 음이에요. 이 음을 중심으로 뭔가 있을 거예요.”

하윤은 그 음을 다시 한번 눌렀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건반 아래의 나무 부분을 더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손끝에 닿은 것은 작고 튀어나온 돌기였다. 돌기를 누르자, 거짓말처럼 피아노 건반 아래의 나무 패널 한쪽이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미세하게 벌어졌다. 그 틈새로 오래된 종이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놀란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패널을 열었다. 안에는 먼지가 쌓인 작은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상자를 꺼내 들자, 바닥에는 마치 피아노 자체의 일부인 것처럼, 닳고 닳은 가죽 수첩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 묶음과 마른 꽃 한 송이가 조심스럽게 보관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수첩과 편지들 아래에 조심스럽게 놓여 있던, 할머니의 필체로 빼곡히 적힌 악보 뭉치였다.

그것은 단순한 악보가 아니었다. 악보 사이사이에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사랑에 대한 단상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맨 앞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의 가장 오래된 피아노에게.
나의 심장이 멈추는 날, 이 노래가 비로소 너의 목소리가 되어 세상에 울려 퍼지기를.
이것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란다. 나의 삶이고, 나의 고백이며,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의 기록이란다.
이것을 발견할 나의 사랑하는 이여, 이 노래를 부르렴. 그리고 기억해주렴.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를.

하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할머니의 노래는 그저 음표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생을 걸쳐 엮어낸 삶의 서사시이자, 그녀에게 남긴 가장 소중한 유언이었다. 그리고 그 노래의 시작은, 피아노 심장부에 숨겨진 한 남자의 오래된 사진이었다. 할머니가 아닌, 낯선 젊은 남자의 사진. 그 사진 뒤에는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1945년 여름,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나의 영원한 피터팬에게.

1945년. 할머니의 젊은 시절, 전쟁의 한가운데. 그리고 ‘피터팬’. 하윤은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의 ‘노래’는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이 낡은 피아노는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한, 비밀스러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었음을 직감했다. 모든 것을 팔아버리려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그녀는 할머니의 노래를 부르고,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이야기를 찾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