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959화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이미 겨울의 전령사였다. 유리창을 긁는 앙상한 나뭇가지 소리가 마치 오랜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미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쥐고 있었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마음속 서늘함을 다 녹이지 못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짙은 감정의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다.

난롯가에 웅크리고 있던 별이가 스르륵 눈을 떴다. 영롱한 초록색 눈동자가 미나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 말없이 미나의 감정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고요한 방 안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쓸쓸함이 오늘따라 깊네요, 미나님.”

미나는 별이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예상했지만, 여전히 그의 정확한 통찰력에 놀라곤 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려 난롯가로 향했다. 별이는 언제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존재였다.

“별이야… 네 말대로야. 오늘은 유난히… 오래된 서랍을 연 기분이 들어.”

별이는 꼬리를 천천히 흔들며 미나의 무릎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부드러운 털이 손끝에 닿자 작은 위안이 밀려왔다.

“어떤 서랍이신가요? 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던 기억의 방에, 미나님조차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던 서랍이 있었군요.”

미나는 별이의 털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선택의 서랍이라고 해야 할까. 돌아갈 수 없는 길목에서, 내가 택하지 않은 길들에 대한 미련 같은 것… 특히나 이런 계절이 오면 더 선명해져. 그때 내가 다른 결정을 했다면…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을까.”

별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깊었다.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현자의 그것 같았다.

“미나님, 고양이들은 지나간 발자국을 되짚지 않습니다. 눈밭에 찍힌 발자국은 언젠가 다른 눈으로 덮이고, 흙길의 흔적은 바람과 비에 씻겨 사라집니다. 우리는 다만, 지금 걷고 있는 발걸음의 무게를 느낄 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달라, 별이야. 우리는 수많은 발자국을 마음에 새겨두고, 때로는 그 발자국이 너무 무거워서 지금 걷는 길을 힘겹게 만들기도 해.”

별이는 가르치듯 조용히 말했다.

“그 발자국들이 무겁다면, 그것은 아마도 미나님께서 그 발자국에 너무 많은 ‘만약’을 얹어두었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그때 그리했다면, 만약 저리했다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만약’들은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저 그림자일 뿐이죠.”

“그림자라… 그래도 그 그림자들이 때로는 너무나 선명해서, 진짜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올 때가 있어.”

미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오래된 풍경들이 스쳐 지나갔다. 젊은 날의 자신, 그리고 함께였던 한 사람…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꿈, 그녀가 놓아야 했던 손. 그 모든 것들이 희미하지만 강렬한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결국 후회라는 건,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은 것일까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문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현재의 내가 더 단단해지는 법을 배우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답을 찾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모든 질문에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별이는 앞발을 들어 미나의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그의 발바닥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그 작은 접촉이 미나의 마음속 차가운 벽을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듯했다.

“때로는 그저 그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그 그림자 속에서 빛나는 작은 지혜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미나님의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자양분이 될 겁니다.”

미나는 별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흔들리는 마음이 비치는 듯했다. 그녀는 그동안 굳게 닫아두었던 ‘선택의 서랍’에 먼지가 쌓인 채 그대로 존재했음을, 그리고 별이의 말처럼 그 서랍을 애써 열어볼 필요도, 혹은 애써 닫아둘 필요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자양분이라… 따뜻한 말이네, 별이야.”

그녀는 별이를 품에 꼭 안았다. 그의 부드러운 체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움츠러들었던 무언가가 스르륵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그녀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니었다.

“별이야, 네 덕분에 오늘 하루도 나에게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었어. 고마워.”

별이는 미나의 품에서 만족스러운 듯 골골송을 불렀다. 창밖의 바람 소리는 여전히 쓸쓸했지만, 미나의 마음속에는 별이의 따뜻한 온기와 지혜로운 말이 잔잔한 빛을 밝히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의 서랍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이제 미나는 그 서랍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더 온화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길고양이와의 대화가 그녀의 삶에 또 하나의 깊은 문장을 새겨 넣은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