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961화

차디찬 유리창 너머로 세상은 온통 흰색이었다. 밤새 내린 눈은 도시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킨 듯 고요했고, 끝없이 이어지는 은빛 물결은 삭막했던 풍경에 한없는 비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은채는 낡은 창턱에 기대어 가만히 눈발을 응시했다. 창문에는 온기가 닿지 않은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성에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하얀 입김이 유리창에 흩어졌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손에 든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차가운 유리창으로부터 스며드는 한기는 그 온기마저 무색하게 만들었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방은 점점 더 춥고 외로워졌다. 난방비조차 버거운 형편에, 온기를 찾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겹겹이 옷을 껴입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왜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걸까.

탁자 위에는 미완성된 자수 작품이 놓여 있었다. 얇은 실크 천 위에 섬세한 눈꽃 문양을 수놓는 작업이었다. 흰색 실과 은색 실이 교차하며 피어나는 결정체는 겨울의 순수함을 닮아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늘은 한참 전에 멈춰 있었다. 마음속에 가라앉은 무거운 돌덩이 때문이었다. 며칠 밤을 지새워가며 완성해 가던 작품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바늘을 잡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래된 약속의 메아리

창밖으로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마치 과거의 기억을 실어 나르는 듯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겨울이 지나갔다. 처음 약속을 했던 그날도 이처럼 눈이 펑펑 내렸었다. 솜털 같은 눈송이가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덮어버리던 그날, 지환은 그녀의 손을 잡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었다.

“은채야, 약속해. 어떤 시련이 닥쳐도, 어떤 겨울이 찾아와도, 우리는 다시 이 눈꽃 아래서 만날 거야. 그때까지, 절대 흔들리지 마.”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뜨거웠던 그의 손길, 흔들림 없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체향까지. 모든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했다. 그 선명했던 기억들은 수많은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고, 그의 모습은 이따금 꿈속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는 아련한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지금 이 순간, 지환은 어디에 있을까. 혹시 그도 이 눈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이 지독한 기다림은 오직 그녀만의 몫인 걸까. 차가운 유리창에 기댄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시린 한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 한기가 심장에 닿자, 무언가 굳어 있던 것이 깨지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다.

똑똑.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 은채는 화들짝 놀라 몸을 바로 세웠다. 누구일까. 이 외딴 곳, 이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혹시…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에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이내 그 기대는 차가운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지환이라면, 노크 대신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문을 열자,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은채 씨, 괜찮은 거예요? 며칠째 집 안에서 인기척이 없어서 걱정했어요. 마침 제가 김치를 담그는 날이라, 조금 가져왔어요.”

할머니의 따뜻한 말과 손에 들린 김치통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에 작은 온기를 불어넣었다. “아, 할머니… 죄송해요. 그냥 몸이 좀 안 좋아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핼쑥한 얼굴을 살펴보았다. “너무 마른 거 아니니. 젊은 사람이 이렇게 힘없이 있으면 어떡해. 혹시 힘든 일이라도 있는 거니?”

은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곧 괜찮아질 거예요.”

할머니는 그녀의 손에 김치통을 들려주며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먹어야 해. 그리고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 계속 방 안에만 있으면 우울해져.”

따뜻한 위로였다. 하지만 그녀는 할머니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 기다림이, 이 약속이 그녀를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그리고 동시에, 이 약속이 그녀를 얼마나 살게 하는지.

눈꽃 속에서 길을 찾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은채는 김치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다시 창가로 향했다. 밖은 여전히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할머니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방 안에만 갇혀 있으면, 그녀는 더 깊은 절망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결심한 듯, 그녀는 가장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문을 나섰다. 텅 빈 복도를 지나, 삐걱거리는 계단을 내려가, 차가운 현관문을 열었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때렸다. 눈꽃이 바람에 휘날리며 그녀의 머리카락과 외투에 닿았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났다.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었고, 그 속에서 그녀는 너무나 작고 나약해 보였다.

공원 벤치에 앉아 그녀는 손바닥 위에 떨어진 눈송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육각형의 완벽한 결정체. 그 하나하나가 경이로웠다. 세상에 똑같은 눈송이는 없다고 했다. 마치 그녀의 삶처럼, 지환과의 약속처럼, 그 어떤 것도 똑같지 않은,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들.

문득, 그녀의 외투 주머니에서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손을 넣어 꺼내보니, 낡은 오르골이었다. 지환이 처음 약속을 하던 날, 그녀에게 선물했던 것이었다. 투명한 유리 구슬 안에 작은 눈꽃이 새겨져 있었고, 태엽을 감으면 ‘눈의 꽃’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오르골은 고장 난 지 오래였다. 몇 번이나 수리를 맡기려 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그녀는 고장 난 오르골을 손안에 쥐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들리지 않는 멜로디가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흔들리지 마, 은채야.”

다시 한번 지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청일까. 아니, 그것은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그와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어떤 어려움 속에 있든, 약속은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단순한 기다림을 넘어, 그녀 스스로를 지탱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눈물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다 이내 얼어붙었다. 서러움,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희망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그녀는 고장 난 오르골을 꽉 움켜쥐었다. 차가웠던 금속이 그녀의 손에서 조금씩 온기를 머금는 듯했다.

그래, 아직은 아니었다.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수많은 겨울이 지나고, 수많은 눈꽃이 내렸어도, 그녀의 마음속에 새겨진 약속의 온기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환이 돌아오지 않아도, 약속은 그녀에게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과 같았다. 이 눈꽃처럼, 혼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야 했다.

은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무릎까지 쌓인 눈밭을 헤치고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거친 겨울을 뚫고 굳건히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같았다. 차가운 겨울 눈꽃이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어쩐지 시원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와의 약속이 단순히 ‘다시 만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약속은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를 지켜내는, 삶에 대한 의지 그 자체였다. 눈은 계속해서 내렸다. 세상의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혹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듯이, 쉼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