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여사는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해가 지는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후 내내 짙게 드리운 구름 때문에 세상은 이미 저물녘처럼 침잠해 있었다. 낡은 응접실은 오래된 가구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처럼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는 흑단 피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피아노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고독해 보였다.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때로는 가슴 저미는 비밀을 간직한 동반자.
손녀 혜린이 찾아와 “할머니, 이제 슬슬 짐 정리도 하셔야죠. 추억은 소중하지만, 이사 갈 집에는 다 가져갈 수 없잖아요.” 하고 말했던 것이 며칠 전이었다. 그 말이 가슴에 콕 박혀 빠지지 않았다. 짐 정리. 단순한 물건 정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삶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의식 같았다. 아니, 삶 전체를 정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지은 여사는 한숨을 내쉬며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끌어당겼다. 먼지가 가득 쌓인 상자는 그녀의 젊은 날의 편린들을 품고 있었다.
상자 안에는 바래고 해어진 사진첩, 이제는 빛을 잃은 실크 스카프, 말린 꽃잎, 그리고 민준과의 결혼 반지 대신 그가 직접 깎아 선물했던 작은 나무 새 한 마리가 들어 있었다. 손끝으로 나무 새의 매끄러운 등을 쓸어보니, 젊은 날 민준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서툰 칼질이 새긴 작은 흠집 하나하나에 웃음과 눈물이 배어 있었다.
깊숙한 곳에서, 캔버스 천으로 정성스레 싸인 얇은 노트 한 권이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자 빛바랜 표지가 드러났다. 민준의 글씨체로 <음악이 흐르는 서정>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가 생전에 늘 품고 다녔던 작은 수첩이었다. 주로 악보의 초안이나 짧은 시구들이 적혀 있었지만, 가끔은 지은 여사도 알지 못하는 그의 내밀한 생각들이 담겨 있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노트를 펼쳤다. 처음 몇 장은 익숙한 멜로디의 단편들이 빼곡했고, 그 뒤로는 그가 자주 흥얼거리던 곡들의 가사가 쓰여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해 가슴이 저릿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을 펼치는 순간,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페이지에는 악보 대신 흑단 피아노의 스케치가 그려져 있었다. 민준이 직접 그린 것임이 분명했다. 섬세한 선으로 건반 하나하나, 페달의 위치, 심지어 피아노 상판의 미세한 스크래치까지 표현되어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림 속 몇몇 건반들이 유독 짙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도약이 있는 연속된 음들이었다. 마치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그리고 그 아래, 민준의 휘갈겨 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내 노래는 언제나 이 안에 잠들어 있네. 그대가 나를 부를 때, 세상은 다시 노래하리.”
지은 여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수첩은 민준이 죽기 한 달 전, 마지막으로 연주회를 열었을 때 그가 직접 챙겨 다니던 것이었다. 그 연주회에서 그는 늘 부르던 익숙한 곡들을 연주했고, 그녀는 그저 평범한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이 문구는 무언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피아노에서 아주 작고 여린 소리가 울렸다. 마치 가늘고 긴 실이 바람에 스치듯, 하지만 분명히 들리는, 단 한 음이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피아노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착각이 아니었음을 확신했다. 마치 그림 속 건반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낀 듯, 피아노가 반응한 것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민준이 마지막으로 연주했던 그 곡, 그리고 그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그림. 노트를 든 채 천천히 피아노로 다가갔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힌 검고 흰 건반들. 그녀의 손이 그림 속에서 짙게 칠해진 첫 번째 건반 위로 미끄러졌다.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눌렀다. 뎅. 맑고 깊은 음이 응접실을 채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어서 그림 속 두 번째 건반, 세 번째 건반. 그녀는 민준의 그림이 이끄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의 파편이 공중에 흩어졌다. 그것은 어떤 곡의 한 구절 같기도 했고, 그저 무의미한 음들의 배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강렬한 울림이 일었다. 이 음표들 안에, 민준이 말한 ‘그의 노래’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자, 피아노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침묵만이 다시 응접실을 지배했다. 지은 여사는 노트를 가슴에 품고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눈은 민준의 글씨가 새겨진 마지막 문구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 노래는 언제나 이 안에 잠들어 있네. 그대가 나를 부를 때, 세상은 다시 노래하리.”
그것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었다. 민준이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약속이자, 어쩌면 그녀가 잃어버렸던 그의 사랑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지도가 아닐까. 낡은 피아노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그녀가 그 노래를 불러야 할 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음표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의 마음속에 오래 잠자고 있던 어떤 감각이 다시 깨어나는 듯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민준과의 긴 대화가 시작된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