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 같은 바람이 창문을 할퀴고 지나가는 밤이었다. 서울의 겨울은 유독 잔인했고, 매서운 한기는 겹겹이 껴입은 옷 속으로 스며들어 뼈마디를 시리게 했다. 미정 씨는 보일러를 평소보다 두어 칸 더 올리고도 쉬이 가시지 않는 냉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거실 창밖으로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부유하는 눈송이들은 잠시 반짝이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곤 했다. 그 모습이 어쩐지 미정 씨의 지나온 세월 같아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이가 떠난 후, 이 집의 겨울밤은 유독 길고 쓸쓸해졌다. 텅 빈 공간을 채우던 온기, 나지막한 목소리, 따뜻한 시선이 사라진 자리는 아무리 두꺼운 이불로 덮어도 싸늘했다.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 미정 씨는 흐릿한 기억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찾아 헤매곤 했다. 오늘 같은 밤에는 특히 그랬다.
그때였다.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할머니, 저 왔어요.” 손자 지후였다. 지후는 대학원 연구실에서 막 퇴근하는 길이었다. 온몸에 눈을 소복하게 이고 들어선 지후의 모습은 마치 한겨울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소년 같았다. 지후는 젖은 외투를 벗어 현관에 걸고는 손을 비비며 거실로 들어섰다. “이야, 눈이 정말 많이 와요. 밖에 장난 아니에요.”
미정 씨는 지후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어붙었던 마음에 온기가 퍼지는 것을 느꼈다. 혼자라는 쓸쓸함은 지후의 존재만으로도 희미해졌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추운데 어서 들어와. 뜨거운 물에 손부터 녹여.”
지후는 할머니 옆에 앉아 으슬거리는 몸을 녹였다. 잠시 후, 주방에서 고소하고 따뜻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미정 씨가 오랜 시간 끓여온 버섯 수프였다. 흰 우유와 크림이 어우러져 부드러운 빛깔을 띠는 수프는 뭉근하게 끓어 오르며 집안 가득 온기를 채웠다. 미정 씨는 큰 냄비를 들고 와 식탁 위에 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를 보자 지후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우와, 할머니 수프! 오늘처럼 추운 날엔 이게 최고죠.”
수프는 미정 씨의 돌아가신 남편, 지후에게는 할아버지의 특별한 레시피였다. 젊은 시절, 남편이 처음으로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미정 씨에게 끓여주었던 수프. 고단한 몸을 이끌고 낯선 땅에서 배워온 서양 수프를, 아내를 위해 직접 만들겠다고 고집하던 그의 미숙한 손길과, 그 안에 담겼던 뜨거운 마음이 수프 한 모금마다 녹아 있었다. 그 이후로 겨울이 오면 남편은 종종 이 버섯 수프를 끓여주곤 했다. 수프를 먹는 동안만큼은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듯한 따뜻한 마법이었다.
미정 씨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휘저으며 옛 추억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처음 끓여줄 땐 말이지, 어찌나 서툴던지 버섯도 제대로 썰지 못했어. 그래도 맛있다고 다 먹어주니 그리 좋아하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네.” 그녀의 목소리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지후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빛에 어리는 슬픔을 보듬어주고 싶었지만, 어떤 위로의 말도 충분치 않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도 지후 너처럼 겨울을 참 좋아했어. 눈 오는 날엔 꼭 이렇게 수프를 끓여놓고 기다렸지. 따뜻한 거 먹고 몸 녹여야 한다고.” 미정 씨는 지후의 그릇에 수프를 듬뿍 담아주었다. 향긋한 버섯 내음과 부드러운 크림의 조화가 입안 가득 퍼졌다. 지후는 천천히 수프를 떠먹었다. 뜨끈한 수프가 목을 넘어갈 때마다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할머니, 이 수프는 진짜 신기해요. 아무리 추운 날씨도, 아무리 힘든 마음도 다 녹여주는 것 같아요.” 지후가 진심으로 말했다. 그의 말에 미정 씨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쩌면 이 수프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온기,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그리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위로의 손길이었다.
한동안 식탁에는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창밖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수프를 먹었다. 수프의 온기가 식탁 위로, 그리고 두 사람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지후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할머니의 손은 따뜻한 수프처럼, 늘 자신을 감싸 안아주는 온기로 가득했다.
“지후야.” 미정 씨가 나지막이 불렀다.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게 참 많아. 이 수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지후는 아무 말 없이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 작은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다. 겨울밤의 따뜻한 수프는 그렇게, 고단한 삶의 한 조각을 어루만지고, 메마른 가슴에 촉촉한 온기를 불어넣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이 작은 집 안에는 다시금 따뜻한 봄날이 찾아온 듯했다. 그 온기 속에서 두 사람은 조용히, 그리고 단단하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삶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따뜻한 수프처럼, 그 온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