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글지글 타오르던 한낮의 태양도 서서히 기울어 가는 시간이었다. 매미 소리는 여전히 맹렬했지만, 이제 그 소리에는 왠지 모를 애달픔이 섞여 있었다. 넓은 마당 한쪽에 놓인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던 할아버지는 조용히 먼 산을 응시하고 계셨다. 그 눈빛 속에 담긴 아련함이 우리 형제의 마음을 건드렸다.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의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고, 때때로 알 수 없는 미소를 띠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빠, 할아버지가 또 저기 보셔.”
은서가 내 팔을 툭툭 쳤다. 은서의 시선이 닿는 곳은 우리 할아버지 댁 뒷산,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오래된 나무들이 빽빽한 능선이었다. 그곳은 어른들도 좀처럼 발길을 하지 않는 곳, 전설 속 ‘바람의 숲’이 숨어 있다는 곳이었다.
잃어버린 노래를 찾아서
할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바람의 숲’ 이야기를 해주곤 하셨다. 그 숲에는 아주 특별한 바람이 불어와, 세상의 잊힌 모든 소리들을 모아 ‘노래’를 만든다고 했다. 그 노래는 오직 가장 순수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들을 수 있으며, 들은 자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거나,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그저 할아버지의 재미있는 옛날이야기쯤으로 생각했지만, 최근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 ‘바람의 숲’에 무언가 간절한 것이 숨겨져 있는 듯 보였다.
“은서야, 우리 오늘 가볼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은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은 할아버지에게 들키지 않게 조용히 신발을 신고 뒷문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먼 산을 바라보고 계셨다. 그 뒷모습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숲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키 큰 풀들이 무성했고, 이리저리 뻗은 나뭇가지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따가운 햇살 아래, 숲은 더위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우리는 옷이 나뭇가지에 긁히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며칠 전 할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조용히 흥얼거리던 노랫가락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자장가 같기도 하고, 어딘가 슬픔이 배어 있는 듯한 멜로디였다.
“오빠, 할아버지의 그 노래… 어쩐지 슬프지 않아?”
은서가 힘겹게 숨을 고르며 물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그 노래를 ‘바람의 숲’에서 찾고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 노래가 ‘바람의 숲’과 관련된 어떤 비밀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시간의 흔적, 그리고 바람의 속삭임
얼마나 걸었을까. 드디어 빽빽하던 숲이 거짓말처럼 옅어지며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 둥근 모양의 공터였다. 그곳의 한가운데에는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크고 오래되어 보이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가지들은 하늘로 뻗어 나가는 대신, 마치 무언가를 감싸 안듯 아래로 드리워져 있었다.
공터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숲의 열기가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감쌌다. 쏴아아 하는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잔잔하고 부드러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나무의 잎사귀들을 흔들며,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쉬이이… 쉬이이…”
나는 조심스럽게 큰 나무 쪽으로 다가갔다. 나무 밑동에는 누군가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듯 매끄러워진 작은 돌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조약돌들이 정성스럽게 쌓여 만들어진 작은 탑이 있었다. 돌탑의 맨 위에는 바래고 해진 천 조각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천 조각에 희미하게 수놓아진 무늬를 보는 순간, 은서가 숨을 들이켰다.
“이거… 할머니 치마에 있던 무늬랑 똑같아!”
그랬다. 언젠가 낡은 사진 속에서 보았던, 할머니가 젊었을 적 즐겨 입으셨다는 여름 치마의 자수 무늬와 같았다. 할머니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먼 길을 떠나셨다. 그래서 우리는 할머니를 기억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눈빛이나, 때때로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할머니는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분으로 존재했다.
바람이 더욱 부드럽게 불어왔다. 큰 나무의 잎사귀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아까 할아버지가 흥얼거리던 그 노래, 그 멜로디와 꼭 닮은 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것은 진짜 노래라기보다는, 마치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지는 듯한, 혹은 할머니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잃어버린 기억을 속삭이는 바람의 노래.
은서가 조심스럽게 돌탑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돌탑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가만히 그 옆에 서서 눈을 감았다. 바람은 내 뺨을 간질였고, 나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슬픔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할아버지에게 이 숲은, 할머니와의 추억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는 이 바람의 노래를 통해 할머니를 만나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비밀, 그리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한참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더 이상 모험의 스릴이나 발견의 흥분은 없었다. 대신 가슴속에 따뜻하면서도 애틋한 감정이 차올랐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로움이었다. 해가 더욱 기울어 숲은 오렌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용히 공터를 떠나 다시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길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풀밭을 가로지르는 바람 소리도 이제는 슬픔이 아닌 위로처럼 들렸다. 할아버지 댁 마당에 도착했을 때, 할아버지는 여전히 평상에 앉아 계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눈빛이 조금 달라 보였다. 우리가 없는 동안 누군가 찾아와 위로를 건넨 듯, 아니면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미소가 살짝 걸려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저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그때, 은서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아버지, 오늘 바람이 정말 좋았어요. 할머니 목소리 같았어요.”
할아버지의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은서의 손을 감싸 쥐셨다. 그리고는 내 어깨를 토닥이셨다. 그 손길 속에는 깊은 이해와 고마움,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여름 방학, 할아버지 댁에서의 모험은 늘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그 세상 속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비밀을 발견한 날이었다.
아직도 숲에서 들려오던 바람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것은 단순히 잊힌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사랑이었고, 할아버지의 추억이었으며, 이제는 우리 형제에게도 깊이 새겨질 소중한 기억이 될 터였다. 이 여름 방학은 우리에게 또 다른 어떤 모험을 선물해 줄까. 밤하늘에는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의 다음 발걸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