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425화

낡은 나무 문을 열자, 후텁지근한 여름 공기마저 숙연해지는 책 냄새가 정우를 감쌌다. 먼지 앉은 책들의 침묵 속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은 삐걱이는 마루 위에서 조심스러웠다. 오랜 추적 끝에 얻은 단 하나의 단서, ‘그녀가 아꼈던 시집의 초판’을 찾아 여기까지 왔다.

“어서 오세요. 무슨 책을 찾으시는지요?”

구석진 카운터에서 백발의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온화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정우는 그녀에게 시집의 제목을 조용히 건넸다. 노파는 안경 너머로 그를 한 번 훑어보더니, 느릿한 움직임으로 서가 사이를 거닐었다. 정우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수백 번의 헛된 희망과 실망이 쌓인 끝에 찾아온 이 순간이, 이번에는 달랐으면 하고 그는 속으로 빌었다.

이윽고 노파가 손에 들고 온 낡은 시집 한 권을 내밀었다. 짙은 남색 표지에 빛바랜 글씨. 정우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집을 받아 들었다. 표지를 매만지는 순간, 잊고 있던 그녀의 체향이 아련히 코끝을 스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연아… 네가 이 책을 만졌을까?’

책장을 넘기자 종이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함께 미세한 세월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찾던 시는 ‘가을 서신’이라는 제목이었다. 오래전, 수연과 함께 늦가을 오후를 보내며 낙엽 지는 풍경을 바라보던 때,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시였다.

정우는 조심스럽게 해당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그의 눈이 한 문장에 멈춰 섰다.

“낙엽은 바람에 실려 아련한 기억을 읊조리고,
나는 그 바람 속에서 그대를 찾아 헤매었네.”

바로 그 문장 옆에, 흐릿하게 남아있는 작은 스케치 하나. 작고 보라색을 띠는 들꽃, 제비꽃이었다. 너무나 작고 섬세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정우는 그 그림을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연은 항상 이 시를 읊을 때마다 이 특정 제비꽃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 넣곤 했다. 그녀의 서명이나 다름없었다.

정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수연아… 맞지? 네가 여기 있었던 거지?’

그는 시집을 든 채 숨을 헐떡였다. 노파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정우는 거의 절규하듯이 물었다.

“이… 이 책의 주인이… 누구였습니까? 혹시… 혹시 수십 년 전부터 이 책을 소유했던 사람을 아시는지요?”

노파는 잠시 침묵하더니, 낡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책은 아주 오래전, 이 동네에 살던 젊은 아가씨의 것이었지요. 늘 이 자리에서 시집을 읽고, 자기만의 표시를 남기곤 했어요. 특히 그 제비꽃 그림을 즐겨 그렸지요.”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메마른 가슴에 단비처럼 쏟아졌다. 정우는 감격에 겨워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몇 달 전이었던가요. 젊은 여인이 와서 이 책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왠지 모르게 저 옛날 아가씨와 많이 닮아 보였어요. 웃는 얼굴이 특히 그랬지요.” 노파의 시선이 정우의 뒤편을 향했다. “아마 그 아가씨의 딸이 아니었을까 싶더군요.”

정우는 숨을 멈췄다. 딸? 수연에게 딸이 있다고? 이 오랜 세월 동안 그가 찾아 헤매던 수연이, 이미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행복해야 할 소식일 텐데, 그의 가슴 한편에서는 알 수 없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 그 젊은 여인은… 어디로 갔습니까?” 정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어떻게 생겼었는지… 혹시 아시는 게 있습니까?”

노파는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더욱 깊고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마치 정우의 지난 수백 화의 고뇌를 모두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 젊은 아가씨는… 아마도 당신을 닮았을 겁니다. 간절한 눈빛이요.” 노파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이 책갈피를 두고 갔습니다. 그 옛날 시집의 주인이 남겼던, 아주 작은… 쪽지와 함께 말이지요.”

노파는 시집 깊숙이 박혀 있던 낡은 책갈피를 꺼내 정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얇은 종이, 빛바랜 가장자리. 그 위에는 수연의 필체로, 정우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 같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달빛이 부서지는 밤, 우리의 비밀의 숲에서 기다릴게.’

그것은 두 사람만이 알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장소였다.
정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것은 과거의 흔적인가, 아니면 미래를 향한 초대장인가. 그의 손에 들린 시집과 책갈피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 헤매던 긴 여정의 끝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시집을 품에 안고 서점 문을 박차고 나섰다. 어두워진 골목길로 뛰어드는 그의 등 뒤로, 노파의 작은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젠 정말… 찾을 때가 된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