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427화

차창 밖으로 굵은 빗줄기가 도시의 색을 지우고 있었다. 낡은 조수석에 던져진 지도는 축축한 습기 때문에 이미 구겨진 지 오래였다. 김민준은 손바닥으로 거친 수염이 돋아난 턱을 쓸어내렸다. 지난 426화의 방황과 절망, 그리고 다시 시작된 희미한 희망이 그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이번 단서는 너무나 희미했다. 십수 년 전, 서연희가 자주 들렀다는 작은 동네 서점의 이름이 희미하게 적힌 낡은 영수증 한 장. 그것이 전부였다.

“정말… 이번엔 맞을까?”

그는 중얼거렸다. 수많은 오보와 좌절이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이제 더 이상 실망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민준은 멈출 수 없었다. 그의 삶은 연희를 찾는 탐정이라는 이름 아래 재정의된 지 오래였다.

오랜 골목길을 헤매다 마침내 그는 낡은 간판을 발견했다. ‘은하수 서점’. 간판의 글씨는 비바람에 깎여 흐릿했지만, 어딘가 아련한 빛을 띠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민준은 빗물에 젖은 어깨를 애써 펴고 서점 문을 열었다. 낡은 종이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세월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삐걱이는 문소리에 안에서 책을 읽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돋보기 너머로 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요. 이런 날씨에 손님이 다 오고….”

민준은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혹시… 서연희라는 이름을 아시나요? 아주 오래전에 이 근처에 살았고, 이 서점을 자주 드나들던 여자아이였습니다.”

노인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라… 그 아이는 이제 여기 오지 않아. 아주 어릴 때부터 왔었지. 책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시집을 즐겨 읽던 아이였지.”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드디어, 드디어 그녀의 흔적을 찾은 것인가. 그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노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그걸 알았다면, 이렇게 쓸쓸히 서점을 지키고 있지는 않았을 테지. 그 아이는 아주 오래전에 사라졌어. 마치 안개처럼 말이야. 많은 이들이 그 아이를 그리워했지.”

다시 찾아온 절망감에 민준은 무릎이 꺾이는 듯했다. 또 다시 막다른 길인가. 그때 노인이 손가락으로 서점 안쪽의 낡은 책장을 가리켰다. “하지만… 최근에 말이야. 아주 닮은 아이가 와. 눈매가 똑같아. 연희처럼 이 서점을 둘러보고, 때로는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기도 해.”

민준은 숨을 멈췄다. “닮은 아이요? 그 아이는… 연희가 아니고요?”

“이름은 달라. 행동도 좀 서툴러 보이고… 하지만 가끔씩 아주 섬세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찾는 듯해. 옛날 연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때가 있지.” 노인은 책상 서랍을 열더니, 낡은 나무 책갈피 하나를 꺼냈다. 손때 묻은 책갈피에는 아주 작고 섬세하게, 민준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와 연희가 어릴 적 함께 만들었던 비밀스러운 상징이었다.

“이 아이가 두고 간 건데, 이걸 보면 분명 생각날 거야. 저번에 잃어버렸다고 애타게 찾더군.” 노인이 책갈피를 민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 조각이 민준의 손바닥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노인은 깊은 눈으로 민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가끔 여기 와서 이 책을 읽고 가곤 했어.”

노인의 손이 가리킨 곳은 낡은 시집 코너였다. 민준은 홀린 듯 그곳으로 다가가 노인이 짚어준 시집을 집어 들었다. 표지는 닳아 해졌고, 숱한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익숙한 시집이었다. 연희가 가장 아끼던, 그가 직접 선물했던 시집. 책장을 넘기자, 가장자리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연희의 글씨체였다. 그리고 그 아래, 방금 노인에게 받은 책갈피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상징이 다시 한번 그려져 있었다.

그 순간, 서점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린 종소리.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문턱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 흐릿한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 노인이 말했던 ‘닮은 아이’. 그녀의 눈은 민준이 들고 있는 시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민준의 손에 쥐어진 나무 책갈피를 발견한 순간, 여인의 얼굴에 일렁이는 파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눈이 흔들렸다. 그 눈 속에는 낯선 경계심과 함께,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리운, 잃어버린 첫사랑의 슬픔이 담겨 있었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 모든 여정의 끝, 혹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듯한 강렬한 예감이 전신을 감쌌다. 그녀의 눈빛,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서 그는 지난 426화의 모든 순간들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저 여인이, 서연희다. 하지만, 왜 그녀의 눈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은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가.

문득 여인의 손이 빗물에 젖은 코트 주머니 속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움켜쥐는 듯한 미세한 움직임. 민준의 심장이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그의 손에는 연희의 글씨가 적힌 시집과 비밀스러운 상징이 새겨진 책갈피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이제껏 찾아 헤매던 그녀가, 하지만 어딘가 낯설고 위험해 보이는 그녀가 서 있었다.

이 지독한 그리움의 끝은, 과연 재회일까, 아니면 더 깊은 미궁으로의 추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