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가을바람이 회색빛 기와 위를 시리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을 어귀의 낡은 은행나무는 마지막 남은 잎새마저 놓아주려 하지 않는 듯, 온몸으로 겨울의 문턱을 거부하며 바들거렸다. 그 아래, 외투 깃을 바싹 여민 채 서 있는 이수미라의 마음 또한 미세하게, 그러나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고재 상자 속에서 발견된,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에는 열아홉쯤 되어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순수하고 맑게 웃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껏 ‘따뜻하다’고 믿었던 이 마을의 평화로운 풍경과는 어딘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오래된 비극의 조각이었다.
“정말… 믿을 수 없어요. 이 마을에 이런 이야기가 숨겨져 있었다니…”
미라는 중얼거렸다. 어제 밤늦게까지 정리하던 마을 회관의 낡은 창고, 그곳에서 오랫동안 잠겨 있던 궤짝을 열었을 때였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인 궤짝 안에는 잊힌 듯한 물건들과 함께 이 사진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뒷면에는 누군가의 서늘한 필체로 휘갈겨 쓴 단 두 단어, ‘능수버들 아래’. 능수버들은 마을의 둑방길을 따라 흐르는 작은 개울가에 홀로 서 있는,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오래된 나무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할머니 나무’라 부르며 신성시했지만, 미라는 이제 그 이름에 왠지 모를 슬픔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그 슬픔은, 이 마을의 따뜻함이라는 가면 아래 숨겨진 거대한 비밀의 징표일지도 모른다고.
미라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둑방길을 따라 정겹게 늘어선 돌담 사이로 난 좁은 오솔길을 걸어 나갔다. 쌀쌀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미라의 심장은 미지의 진실을 향한 열망으로 뜨겁게 타올랐다. 사진 속 여인은 대체 누구였을까. 왜 그녀의 흔적은 이토록 오랫동안, 마치 고의적으로 잊힌 것처럼 숨겨져 있었을까. 그리고 능수버들 아래에는 그녀의 삶과 어떤 비밀이 묻혀 있는 걸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들이 엉켜 소용돌이쳤다.
그녀가 능수버들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고개를 들자, 저 멀리 마을 어귀에서 동구 이장님이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쌀가마니를 옮기는 듯 보였는데, 그의 시선이 미라에게 닿자마자, 동구 이장은 마치 뜨거운 것에 데인 것처럼 황급히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척했다. 미라는 그 미묘하고 빠른 시선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이 마을의 깊은 비밀, 특히 ‘능수버들 아래’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라의 경계심은 더욱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따뜻한 웃음 뒤에 숨겨진 차가운 눈빛이 느껴지는 듯했다.
능수버들 아래는 작은 돌무더기와 함께 얕은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나간 듯, 혹은 누군가 오랜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감추려 애쓴 흔적 같았다. 미라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맨손으로 차가운 흙을 파헤치기 시작하자, 한기와 함께 습한 흙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흙 속에서는 질긴 마른 풀뿌리와 작은 돌멩이들이 섞여 나왔다. 억겁의 세월이 그 위에 내려앉은 듯, 흙은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손톱 밑으로 흙이 파고들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쑤셔왔지만, 미라는 멈출 수 없었다. 이 흙 아래, 그녀가 찾아 헤매던 진실이 잠들어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손가락 끝이 시리고 저려올 때쯤, 무언가 단단하고 평평한 것이 손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흙을 털어내자, 낡고 오래된 나무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겉은 흙과 습기로 인해 많이 부식되어 있었지만, 미라는 상자 모서리의 섬세한 조각을 통해 이것이 단순한 상자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심장이 격렬하게, 그러나 고통스럽게 뛰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전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상자는 침묵 속에 잠겨 미라의 손길을 기다린 듯했다. 그녀는 그 상자에서 과거의 한숨과 눈물을 느꼈다.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종이의 낡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상자 안에는 여러 개의 빛바랜 편지와 함께 작은 천 조각에 싸인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편지는 습기로 인해 글씨가 번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읽을 수 있는 이름 하나가 미라의 눈에 들어왔다.
김순옥.
사진 속의 바로 그 여인. 미라는 떨리는 손으로 가장 위에 놓인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한 글자 한 글자 눈으로 좇았다. 편지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격동의 시대, 1950년대 후반에 쓰인 것이었다. 내용은 미라의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사랑하는 정호 오빠에게. 그리고 이 편지를 보게 될 모든 이들에게… 저는 죄가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저를 의심하고 모함하지만, 저는 그저 병든 할머니를 위해 깊은 산에 약초를 캐러 갔을 뿐입니다. 그날 밤, 읍내 장터에서 사라진 귀한 쌀가마니와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제발… 제 말을 믿어주세요. 읍내에 계신 김 나으리께 가서 제 결백을 증명해 달라 청했지만,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 않았어요. 모두가 저를 손가락질하며 ‘저 아이 때문에 마을에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수군거렸습니다. 저는 이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아마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사랑하는 정호 오빠, 제가 사라지면 이 편지를 찾아주세요. 이 능수버들 아래… 그곳에 저의 모든 슬픔과 진실이 묻혀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언젠가 제 진실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편지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마치 비명을 지르다 멈춘 듯, 절박한 외침이 글자마다, 잉크 번짐마다 배어 있었다. 김순옥이라는 여인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마을을 떠나야 했거나, 어쩌면 더 비극적이고 끔찍한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미라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 ‘따뜻한’ 마을의 이면에 이렇게 차갑고 잔인한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니. 미라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60년 전의 억울함이 시간을 넘어 지금, 그녀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
미라는 떨리는 손으로 작은 천 조각을 풀었다. 그 안에는 다 닳아버린 옥가락지 하나와, 빛이 바랬지만 섬세하게 수놓아진 작은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손수건 한구석에는 ‘순옥이’라는 글자가 붉은 실로 정교하게 자수되어 있었다. 이것은 김순옥이라는 여인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그녀가 겪은 고통이 얼마나 깊고 생생했는지를 증명하는, 살아있는 유물과도 같았다. 미라는 손수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마치 순옥의 체온이 아직 남아있는 듯했다.
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흙먼지를 털어내려던 미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혼이 짙게 깔린 둑방길 너머로, 그림자처럼 서 있는 희미한 인영이 보였다. 동구 이장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미라가 상자를 여는 소리에 이끌려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마치 석상처럼 미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의 너털웃음 대신, 알 수 없는 깊은 슬픔과 함께 차가운 경계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어두웠다. 그 시선은 미라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미라 씨… 거기서 무엇을 찾았니?”
동구 이장의 목소리는 평소의 쾌활함 대신,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시선은 상자를 품에 안은 미라의 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오랜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비밀의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바람 같았다. 미라는 상자를 품에 안은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 그녀는 알았다. 이 마을의 ‘따뜻함’은 단지 겉모습일 뿐이었다는 것을. 그 아래에는 수십 년간 잊혀진 채, 혹은 고의적으로 묻혀 있던 차갑고 아픈 진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거인처럼,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밤이 완전히 찾아오고 있었다.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지만, 미라에게는 그 불빛마저도 진실을 감추려는 허상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는 손에 든 낡은 편지와 유물을 꽉 쥐었다. 김순옥의 절박한 외침이 60년의 시간을 넘어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이 마을의 깊은 비밀을 파헤치고, 억울하게 사라진 여인의 진실을 밝혀낼 숙명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동구 이장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를 쫓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경고였을까, 아니면 이 비밀이 단순히 김순옥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님을 암시하는 또 다른 미스터리의 시작일까. 미라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결심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60년 전의 비극 속에서 울부짖던 김순옥의 영혼이, 마치 바람처럼 그녀와 함께 서 있는 듯했다.
“이장님… 이 마을의 진짜 이야기는… 대체 무엇인가요?”
미라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그리고 멀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속으로 울려 퍼졌다. 동구 이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림자처럼 서서, 완전히 어두워지는 마을과 함께 비밀 속으로 더욱 깊이 잠겨들 뿐이었다. 능수버들의 축 늘어진 가지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숨죽여 흐느끼는 듯했다. 제984화, 진실을 향한 미라의 발걸음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