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익숙한 듯 낯선 골목 어귀에 멈춰 섰다. 낡은 벽돌 건물들 사이, 희미한 등불 아래 자리 잡은 작은 카페 ‘시간의 쉼터’. 흑백 사진 속 유진이 웃고 있던 배경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수백 번 넘게 그의 손에서 바래고 닳았던 그 사진, 그 속의 미소가 이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손에 든 낡은 수첩을 다시 확인했다. 어제 밤늦게 입수한 단서. ‘시간의 쉼터’에서 일하고 있다는, 유진과 너무도 닮은 여자에 대한 제보. 440번째 챕터에서 드디어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아니, 종지부가 아닌 새로운 시작이기를 바랐다. 아니, 어쩌면 이대로 영원히 미궁 속에 남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모순된 생각마저 스쳤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낡은 나무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과거의 문을 열어주는 듯했다. 옅은 커피 향과 오래된 책 냄새가 뒤섞인 공간. 낮은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창가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응시하는 여인의 뒷모습이 현우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긴 생머리, 살짝 숙인 고개, 차가 담긴 찻잔을 감싸 쥔 가느다란 손가락. 모든 것이 그의 기억 속 유진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심장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뛰었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현우는 홀린 듯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는 듯했다. 망설임과 간절함,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의 파도 속에서 그의 눈은 오직 그녀에게로 향했다.
바로 그녀의 등 뒤에 섰을 때, 그녀는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직감이라도 한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찰나의 순간 그의 눈과 마주쳤다. 어릴 적 꿈속에서 수도 없이 그려왔던 그 눈동자. 별빛처럼 반짝이던 깊이와 색깔까지 똑같았다.
“유진아…”
현우의 입술에서 막 소리가 터져 나오려는 순간,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그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은 현우의 어깨 너머, 카페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뒤늦게 현우는 자신의 뒤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
맑고 또렷한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작은 아이가 통통거리는 발걸음으로 달려와 그녀의 품에 안겼다. 여인은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여인의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테이블 위로 툭 던져진 그림 한 장을 가리켰다. 해맑은 얼굴로 손가락질하며 ‘엄마랑 나랑 아빠’라고 삐뚤빼뚤 쓰인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현우의 눈동자 속 별빛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20년의 세월 동안 그를 지탱해왔던 모든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만의 유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아내였다.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지만, 그에게 향하는 빛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그의 유진에게서 읽어낼 수 있었던 아련한 추억의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다시 현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시선은 이전과 달리, 낯선 손님을 향한 사무적인 호기심과 약간의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본 듯,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를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세상은 정지했고, 시간은 얼어붙었다.
현우는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카페 문을 향해, 그의 찬란했던 첫사랑의 잔해가 흩날리는 곳을 벗어나기 위해. 닫히는 문틈으로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모습은, 아이와 함께 웃고 있는 너무도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그날 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던 탐정이 아닌, 스스로를 잃어버린 한 남자가 되어 차가운 밤거리를 헤매었다. 20년 동안 찾아 헤매던 유진이 눈앞에 나타났음에도, 그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아니, 잡아서는 안 되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그녀를 갈구했지만, 그의 이성은 차갑게 속삭였다. 이제, 너는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현우는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수많은 단서와 수많은 좌절, 그리고 단 한 사람을 향한 맹목적인 열망. 그 모든 것이 오늘, 이 밤을 기점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그의 탐정 생활은 계속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제는 새로운 탐정을 찾아야 할 때일까. 자신을 찾아서 떠나야 할 탐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