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998화

깊어가는 밤, 시계바늘이 12시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도시의 불빛이 아무리 찬란해도, 이 시간만큼은 하늘의 별들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간이죠.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진행자 김현우입니다.

언제나처럼 스튜디오 창밖으로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착각이 듭니다. 사실은 서울의 밤하늘이라 별 보기 참 힘들죠.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을 겁니다. 오늘 밤도, 여러분의 마음속 별들이 저에게 닿기를 바라며, 첫 곡 듣고 오겠습니다.
루시드폴의 ‘별의 발자국’.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잠시 후 볼륨이 줄어든다.)

사연, 별이 쏟아지던 계곡의 약속

다시 돌아왔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입니다. 방금 들으신 곡은 루시드폴의 ‘별의 발자국’이었습니다.
밤하늘을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셨나요? 저마다 다른 길을 걷지만, 때로는 같은 별을 바라보며 걷는다는 느낌, 참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오늘 첫 번째 사연은 익명으로 보내주신 지아님의 이야기입니다. 지아님은 이렇게 적어주셨네요.

안녕하세요, 현우 DJ님. 저는 한참을 망설이다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아니,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제 나이 서른넷, 아직도 그 여름날의 기억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열두 살 여름, 저는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의 깊은 산골로 휴가를 갔습니다.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었죠. 밤이 되면 쏟아질 듯한 별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습니다. 도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었어요. 그때, 저는 우연히 옆 캠핑장 텐트에서 저와 또래의 한 아이를 만났습니다. 이름은 지훈이었습니다. 낡은 기타를 들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며 조용히 흥얼거리던 아이였죠.

저는 지훈이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물론, 아이의 순수한 동경 같은 감정이었지만요. 매일 밤 우리는 몰래 텐트를 빠져나와 냇가 옆 너럭바위 위에 앉아 별을 세었습니다. 지훈이는 저에게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저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은하수만큼이나 깊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느 날 밤, 유난히 별이 밝았던 그날, 지훈이는 제게 말했어요. “지아야, 우리 10년 뒤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 그때도 이렇게 별 보면서 이야기하자.”
저는 고개를 끄덕였죠. 꼬마들의 맹세였지만, 그때는 세상 그 어떤 약속보다 단단하다고 믿었습니다. 우리의 손가락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하늘의 별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여름은 짧았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다시 연락할 방법도 몰랐고, 그저 10년 뒤 그 장소에서 만나자는 약속만이 저를 지탱하는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10년 뒤, 저는 그 약속 장소로 향했습니다.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의 약속도 미루고, 그 옛날의 너럭바위를 찾아갔죠. 밤이 깊도록 기다렸지만, 지훈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름날의 별들만 저를 내려다볼 뿐이었죠. 그렇게 저는 스무 살의 여름을 지훈이를 기다리며 눈물로 보냈습니다.

그 후로도 몇 번,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곳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서른 살에도, 그리고 작년 여름에도요. 하지만 너럭바위는 늘 저 혼자였습니다. 이제는 그 아이의 얼굴도 희미해지고, 목소리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의 무게는 여전히 제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약속이 저를 붙잡고 있는 건지, 아니면 제가 그 약속을 놓지 못하는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현우 DJ님, 그 아이는 저를 잊었을까요? 아니면 그 약속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있을까요?
저는 이제 그 약속을 놓아줘야 할까요? 아니면 언젠가 그 별이 쏟아지던 계곡에서 지훈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밤도, 제 마음속의 별들은 그 옛날처럼 아프게 빛나고 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아 드림.

지아님의 사연이었습니다. 사연을 읽는 내내 제 마음속에도 아련한 추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는 지아님처럼 가슴 한 켠에 묻어둔, 잊히지 않는 약속이나 추억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두 살 아이들의 약속. 그 순수함이 스무 살을 지나 서른을 넘어 지금까지도 지아님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 참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지훈이라는 아이는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잊었을까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답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아님, 중요한 것은 지훈이가 그 약속을 기억하느냐 마느냐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통해 지아님이 얻었던 순수한 기쁨과 그 시간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무 살의 아픔, 서른 살의 미련, 그리고 지금의 망설임. 이 모든 감정들이 그 약속의 무게를 더하고 있는 것이겠죠.

때로는 놓아주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놓아준다는 것이 그 약속을 잊어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마음의 한 켠에 고이 접어두고,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일 겁니다. 마치 오래된 일기장을 펼쳐보듯이, 따뜻한 미소와 함께 말이죠.

어쩌면 지훈이도, 지아님처럼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설령 그가 이 라디오를 듣지 못하고, 그 약속을 잊었다 할지라도, 지아님에게는 그 약속이 가져다준 아름다운 여름밤의 기억과, 어린 시절의 순수한 설렘이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그 별이 쏟아지던 계곡의 약속은, 지아님에게 더 이상 슬픔이나 미련의 끈이 아니라, 어린 날의 꿈과 희망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별자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 별자리를 따라 지아님만의 새로운 길을 걸어가는 건 어떨까요? 언젠가 그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별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지아님의 사연에 위로가 될 만한 곡 한 곡 띄워드립니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입니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볼륨이 점차 커진다.)

DJ의 소회

(음악이 끝나고 다시 김현우 DJ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광석 님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였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과 추억에 대한 노래였죠.
지아님의 사연을 들으며, 저 역시 어린 시절의 어느 여름밤을 떠올렸습니다. 모든 것이 반짝이던 그 순간들 말입니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혹은 꿈이든. 우리 마음속에 품었던 수많은 약속들. 어떤 것은 이루어졌고, 어떤 것은 아쉽게도 흐릿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들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지금의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별이 빛나고 있나요? 잊었던 약속이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새롭게 만들고 싶은 미래의 약속이 있나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그 별들이 여러분의 밤을 더욱 따뜻하게 비춰주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제998화, 오늘 방송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999화에서는 또 어떤 사연들이 저를 찾아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항상 여러분 곁에서 별처럼 빛나는 이야기가 되어드리겠습니다.

밤이 깊어졌습니다. 모두 편안한 밤 보내세요.
저는 김현우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엔딩 시그널 음악이 흐르고, 스튜디오 불빛이 서서히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