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여명을 뚫고 마을 지붕 위로 붉은 기운이 솟아오를 때, 이장님은 이미 마루에 앉아 있었다. 온몸을 감싸는 서늘한 공기, 그러나 곧이어 찾아올 햇살의 따스함을 예견하는 듯한 청량함이 좋았다. 후루룩, 후루룩.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누룽지 숭늉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뱃속 깊은 곳부터 든든함이 차올랐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트럭 시동 소리, 그리고 갓 볶은 참기름 냄새까지. 이 모든 것이 이장님에게는 마을의 심장 박동 소리 같았다.
“이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밭으로 향하던 김 씨 할머니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장님은 허리에 찬 만보기를 두드리며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할머니도 좋은 아침이시구먼! 오늘도 허리 조심해가며 일하셔요!” 김 씨 할머니는 이장님의 유쾌한 덕담에 싱긋 웃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런 소소한 아침 인사들이 이장님의 하루를 시작하는 비타민이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이장님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고장 난 가로등을 체크하고, 혹시 밤새 길을 막은 나뭇가지라도 없는지 살피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구석구석을 살피는 그의 눈은 매처럼 날카로웠지만, 마을 사람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늘 솜털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마을 어귀, 젊은 미영 씨가 새로 연 공방 앞이었다. 원래 도시에서 디자인 일을 하다가 몇 달 전 고향으로 돌아와 작은 공방을 꾸린 미영 씨였다. 도시의 번잡함보다 시골의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내려왔지만,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은 듯 보였다. 아침부터 굳게 닫힌 문, 그리고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어지러운 작업실 풍경. 이장님의 직감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다. 며칠 전부터 미영 씨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장님은 크게 기침하며 문을 두드렸다. “미영 씨! 안에 있나?”
잠시 후,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미영 씨의 얼굴은 며칠 밤을 꼬박 새운 듯 푸석했고, 눈가에는 짙은 피로감이 역력했다. “아… 이장님. 죄송해요. 아직 문 열 시간이 아닌데…”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괜찮여, 괜찮여. 아침 운동하다가 목이 좀 말라서 말여. 따뜻한 차 한 잔 얻어마실 수 있을까 싶어서.” 이장님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영 씨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세요. 지저분하지만…”
작업실 안은 그녀의 말처럼 어수선했다. 나무 조각들과 끈, 여러 가지 색깔의 실타래들이 바닥에 뒹굴었고, 작업대 위에는 미완성으로 보이는 목각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는 팔이 부러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눈코입이 제대로 조각되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미영 씨가 끓여준 숭늉을 받아 들고 이장님은 조용히 작업실을 둘러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숨처럼 널브러진 미영 씨의 꿈 조각들이었다.
“요 인형들이 다 미영 씨 작품이여? 예쁘네.” 이장님은 팔이 부러진 인형 하나를 집어 들고는 칭찬했다. 미영 씨는 씁쓸하게 웃었다. “보기에는 그렇죠. 근데 생각처럼 잘 안 돼요. 도시에서처럼 주문이 꾸준히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제가 만들고 싶은 것들은 마을 분들이 이해 못 하시는 것 같고… 재료 수급도 어렵고, 결국 다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거겠죠.” 그녀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묻어났다. 꿈을 좇아 내려왔건만, 현실의 벽은 너무나 높았다.
이장님은 인형을 내려놓고 미영 씨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미영 씨, 혹시 옛날에 우리 마을 뒷산에 커다란 참나무 한 그루가 있었던 거 아남?”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미영 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잘 몰라요.”
“그 참나무가 말여, 아주 특별했어. 봄에는 새싹이 돋고, 여름엔 잎이 무성하고, 가을엔 도토리 열매를 맺었지. 근데 겨울만 되면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서 다들 죽은 나무인 줄 알았지 뭐야. 비바람이 불고 눈이 쌓여도 꿋꿋이 서 있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버팀목 참나무’라고 불렀어.” 이장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근데 어느 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오고 강풍이 불어서, 그 참나무가 기어이 쓰러지고 말았지. 마을 사람들이 다들 안타까워했어. 수십 년을 버텨온 나무였으니 얼마나 아쉬웠겠어. 근데 몇 년 뒤, 그 참나무가 쓰러진 자리에서 작은 새싹들이 돋아나는 거 아니겠어? 참나무 뿌리가 살아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새싹들이 자라서 지금은 또 다른 숲을 이루고 있지.”
미영 씨는 이장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투박하지만 진심 어린 목소리가 잔잔한 위로가 되어 스며드는 듯했다.
“미영 씨, 지금 혹독한 겨울을 지나는 참나무 같구먼. 힘들고, 지치고, 때로는 쓰러질 것 같겠지만, 뿌리는 살아 있는 법이여. 중요한 건 버티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다시 새싹을 틔울 힘을 찾는 것이지. 이 부러진 팔도, 제대로 조각되지 않은 눈코입도, 다 그 과정인 거야. 실패가 아니라, 다음에 더 단단한 참나무가 될 양분이 되는 거지.” 이장님은 따뜻한 숭늉 잔을 미영 씨에게 다시 내밀었다. “이장님이 이런 말 한다고 바로 힘이 나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마을엔 미영 씨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거, 그거 하나는 알아줬으면 좋겠네.”
미영 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꾹 참고 있던 감정들이 이장님의 따스한 말 한마디에 터져 나오려는 듯했다. “이장님… 제가 너무 나약한가 봐요.”
“나약한 게 아녀. 그냥 잠시 쉬어가는 것뿐이지. 급할 거 없어. 천천히 가도 괜찮아. 이 마을은 늘 미영 씨 편이니까.” 이장님은 미영 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리고는 불쑥 말했다. “참, 다음 주 토요일에 마을회관에서 바자회를 할 건데, 미영 씨 작품 몇 개 내놓으면 어떨까? 작은 거라도 괜찮으니. 마을 사람들이 다 좋아할 거여.”
그것은 강요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 기회, 그녀의 재능을 마을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부드러운 제안이었다. 미영 씨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피어나는 듯했다. “바자회요…?”
“그래, 바자회. 뭐든 좋으니 부담 갖지 말고 몇 개만 가져와 봐. 분명히 미영 씨 작품을 아껴줄 사람이 있을 거야.” 이장님은 환하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 그렇듯,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공방을 나서는 이장님의 발걸음은 다시 가벼워졌다. 그의 하루는 이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때로는 잃어버린 강아지를 찾아주고, 때로는 이웃 간의 사소한 다툼을 중재하며, 때로는 이처럼 절망에 빠진 젊은이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기도 했다. 그의 유쾌함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을 향한 깊은 사랑과 오랜 세월을 통해 얻은 지혜가 만들어낸,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마음의 힘이었다.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마을을 감쌀 때, 이장님은 다시 마루에 앉았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흘러갔음에 감사하며, 내일의 태양이 또 다른 희망을 가져다줄 것을 기대했다. 미영 씨의 공방 불빛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 불빛 속에서, 버팀목 참나무의 새싹처럼, 그녀의 새로운 꿈이 싹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장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이 이장님의 하루였고, 그가 사랑하는 마을의 소박하지만 찬란한 풍경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