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우는 익숙한 엔진 소음과 함께 익숙하지 않은 갯내음을 맡았다. 수많은 길을 헤매고 수많은 얼굴을 스쳐 지나갔던 지난 수십 년의 세월. 그 모든 탐색의 종착역이 어쩌면 바로 이곳, 흙냄새와 바닷바람이 뒤섞인 이 작은 어촌 마을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가슴을 옥죄어왔다. 그의 낡은 승용차는 비포장도로의 작은 돌멩이들을 퉁기며 ‘흙의 노래’라는 간판이 걸린 낡은 공방 앞에 멈춰 섰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목조 건물은 바닷바람에 퇴색되어 있었지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자기들은 묘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현우는 차에서 내려 심호흡을 했다. 매번 새로운 단서 앞에 섰을 때마다 찾아오는 이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감정은, 그를 지치게 하면서도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손에 쥔 것은 며칠 전 경매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자 주병의 사진 한 장이었다. 섬세하게 조각된 매화 문양 아래,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점 하나. 아주 어릴 적, 이수연이 장난스럽게 점토에 새기곤 했던 그녀만의 서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 점 하나가 그를 천 리 밖 이 외딴곳까지 이끌었다. 경매 관계자는 이 주병이 한때 이 공방에서 제작된 것이라는 단서만을 알려주었다.
현우는 삐걱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흙냄새와 유약 냄새, 그리고 오래된 나무의 향이 섞여 후각을 자극했다. 공방 안은 고요했다. 벽면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의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물레가 주인을 기다리는 듯 정지해 있었다. 유리 진열장 너머, 작업대 위에 흙을 만지고 있는 한 노인이 보였다. 백발의 머리를 곱게 빗어 넘기고 푸른 작업복을 입은 그녀는 조용히 흙과 대화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현우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고요한 공방에 울려 퍼졌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은 눈매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날카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그녀는 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시 흙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나직하고 단호했다.
“이곳이 ‘흙의 노래’ 공방이 맞습니까?” 현우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보는 대로.”
현우는 조심스럽게 주병 사진을 내밀었다. “제가 이 작품의 출처를 찾고 있습니다. 특별한 문양이 있어서요.”
노인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그녀의 눈이 사진 속 매화 문양 아래 작은 점에 닿는 순간, 미세하게 동요하는 것을 현우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굳게 다물린 입술이 살짝 열렸다.
“이 표식은…” 그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이건 수연이의 것이었습니다.”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수없이 불러왔던 이름, 수없이 찾아 헤맸던 이름. 드디어 그 이름이 이곳에서, 그의 눈앞에서 울려 퍼졌다.
“수연이요? 이수연 말입니까?” 현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제자였죠. 손재주가 좋고 마음이 여려서, 제가 참 아끼던 아이였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사라졌지만…”
“사라졌다고요?” 현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또다시 막다른 길인가. 아니, 이번만은 달라야 했다. “그럼 혹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 건 없으십니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글쎄요. 그저 편지 한 통만 남기고 떠났어요. ‘더는 폐를 끼칠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는 짧은 말만 남기고. 그 아이의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사정이 있었던 듯했어요.” 그녀는 현우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시기에,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그 아이를 찾는 겁니까?”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깊은 상처이자 희망. “저는… 그녀의 첫사랑입니다. 어릴 적 헤어진 후로, 한 번도 그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노인은 현우의 눈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첫사랑이라… 세상에 그런 마음도 남아있는 모양이네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방 안쪽 깊숙한 곳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들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완성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 갔지요. 어쩌면 거기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현우의 심장이 다시금 쿵쾅거렸다. 단서! 수천 번의 발걸음 끝에 드디어 손에 닿을 만한 단서가 눈앞에 있었다. 노인은 작업대 뒤편에 있는 낡은 선반 쪽으로 걸어갔다. 높이 놓인 선반 위, 하얀 천으로 덮인 무언가가 있었다. 노인은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 드러난 것은 아직 유약 처리도 되지 않은, 흙빛 그대로의 백자 화병이었다. 수연의 손길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곡선, 아직 완성되지 못한 채 멈춰 선 형태는 마치 그녀의 멈춰버린 시간 같았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화병을 손에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흙덩이.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화병의 밑동을 살펴보던 현우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작은 손톱 자국 같은 것이 흙에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글자들이 흙 속에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숨겨진 메시지처럼.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따라가자, 그의 눈앞에 글자들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20XX년 X월 X일… 지키지 못한 약속.”
현우의 손에서 화병이 미끄러질 뻔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20XX년 X월 X일. 그것은 그들이 헤어진 날로부터 정확히 10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리고 ‘지키지 못한 약속’. 그 약속은 분명, 현우와 수연이 어릴 적 서로에게 했던,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맹세였다. 그 약속은 왜 ‘지키지 못한’ 것이 되어버렸을까. 누가 지키지 못한 것일까. 그리고 이 메시지는 과연 그에게 향하는 것이었을까?
현우는 혼란과 고통 속에서 화병을 꽉 움켜쥐었다.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 메시지는 희망의 끈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1015번째 챕터에서, 그의 첫사랑은 여전히 미궁 속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미궁의 입구에 선명한 발자국 하나가 찍힌 것만 같았다. 그 발자국을 따라가면, 그는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