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036화

차가운 겨울의 잔향이 채 가시지 않은 대청마루에 앉아 화연은 눈을 감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 맵싸했지만, 그 속에는 분명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실려 있었다. 얼어붙었던 대지가 해빙하며 내뿜는 흙내음, 갓 돋아난 여린 풀잎들의 숨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고요한 산사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찾아오는 익숙한 변화였지만, 올해는 유독 그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화연의 메마른 가슴을 파고들었다.

세월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해갔으나, 어떤 상처는 시간 속에서도 바래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지는 법이었다. 스물여덟 번의 봄이 다시 찾아오는 동안, 화연의 삶은 수많은 파도와 회한으로 점철되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졌고, 검은 머리칼은 은회색으로 변했지만, 그 시절 봄바람에 실려 사라졌던 작은 그림자에 대한 그리움만은 변함없이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날도 이와 같은 봄바람이 불었다. 모든 것을 휩쓸고 가버린 그 바람은, 동시에 너무도 소중한 것을 앗아가 버린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그때였다. 귓가를 간질이던 바람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아주 희미하지만 지독히도 익숙한 향기를 실어 왔다. 그것은 이 땅 어디에서도 쉽게 맡을 수 없는, 깊은 산속 어느 계곡 양지바른 곳에서만 피어난다는, 귀하디귀한 ‘푸른 이슬꽃’의 향기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꺾어와 머리맡에 두곤 했던, 은은하면서도 맑은 그 향기. 그리고… 바로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품에 안고 있던 작은 꽃잎의 향기였다. 화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환청인가? 아니, 착각인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산자락을 휘감고 도는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흙내음과 풀내음 사이로, 기적처럼 그 푸른 이슬꽃의 향기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화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어 그 향기를 폐 깊숙이 담았다. 어쩌면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수십 년을 잊지 못하고 헤매는 망령이 된 듯했지만, 이 향기는 너무도 생생했다. 기억의 저편에서, 마지막으로 그 아이를 보았을 때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봄볕 아래 반짝이던 작은 눈동자, 품에 소중히 안고 있던 푸른 이슬꽃 한 송이… 그리고 그녀를 향해 해맑게 웃던 그 모습.

그때, 조용히 문이 열리며 지호가 들어섰다. 그는 화연의 외손자로,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늠름한 청년이었다. 화연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유일하게 여는 존재이기도 했다. 지호는 차를 내오려다 화연의 얼굴에 드리워진 알 수 없는 표정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화연은 감겨 있던 눈을 다시 뜨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다. 그저 봄바람이… 꽤나 유별난 소식을 전해주는구나 싶어서.”

지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유별난 소식이요? 혹시 제가 듣지 못한 것이라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사실, 요 며칠 전부터 마을에 좀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북쪽 산자락 너머, 폐허가 된 옛 ‘청풍루’ 부근에서 예전부터 보이지 않던 낯선 이들이 오갔다는 이야기가요. 그들 중에는… 아주 오래된 옛 문양을 가진 비단 조각을 들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고 합니다. 마치… 할머니께서 늘 찾으시던 그 표식과도 같은…”

지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화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푸른 이슬꽃의 향기, 그리고 지호가 전하는 옛 표식의 이야기. 모든 것이 너무나 우연의 일치였다. 청풍루… 그곳은 아이가 사라지던 날, 마지막으로 목격되었다는 장소였다. 폐허가 되어 버린 그곳에서, 사라졌던 표식이 다시 나타났다? 봄바람이 단순한 향기만을 실어 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물여덟 해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희망의 문을 열어젖히는 빗장이자, 기다림의 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화연은 천천히 일어섰다. 흐트러짐 없던 그녀의 자세는 미세하게 흔들렸으나, 그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 세월 쌓인 회한과 체념이 걷히고, 그 자리에 뜨거운 결의가 솟아났다.

“지호야.”

“네, 할머니.”

“이제, 움직여야 할 때가 된 것 같구나.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무게와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 스물여덟 번의 봄을 기다려온 여인의 마음에, 마침내 새로운 운명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 씨앗은 따스한 봄볕과 간절한 바람을 먹고, 오랜 침묵을 깨고 솟아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연은 창밖을 응시했다. 봄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다. 이제 그 바람은, 단순한 소식을 넘어 하나의 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다시 시작될 이야기의 서곡을 알리는… 강력한 바람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