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은 마루에 앉아 연한 햇살을 쬐고 있었다. 덧문 틈새로 스며든 봄바람은 갓 피어난 진달래 향기와 흙 내음을 실어 날랐다. 마당 가득 드리워진 라일락 나무는 이제 막 연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그 아래에는 겨울의 흔적을 지운 새싹들이 뾰족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와 생명의 속삭임을 들려주건만, 서연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차디찬 겨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벌써 십 년이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은 갓 피어난 꽃잎처럼 여린 기억들을 무수히 스쳐 지나갔지만, 그녀의 가슴에 박힌 어떤 상처는 마치 화석처럼 굳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차 한 잔을 들고 고요히 앉아 있던 서연의 눈길은 마당 저편, 오래된 감나무에 닿았다. 앙상했던 가지마다 연둣빛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저 감나무처럼, 자신의 메마른 삶에도 다시 한번 푸른 잎이 돋아날 수 있을까. 그녀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 아이를 떠나보낸 후, 서연의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시간은 흘러갔지만, 잊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더욱 선명해지고, 아픔은 깊이를 더해갔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열렸다. 서연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 외딴집을 찾아오는 이는 거의 없었다. 대문 틈으로 들어선 사람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러나 얼굴에는 피로와 근심이 역력한 중년의 여인. 그녀는 다름 아닌, 서연의 오래된 친구이자 한때 함께 일했던 수진이었다.
“수진아?”
서연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희미한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수진은 굳은 얼굴로 서연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다.
“서연아, 오랜만이야. 괜찮아?”
수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가라앉아 있었다. 서연은 뭔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수진이 이 먼 곳까지 찾아올 때는 늘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좋은 소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슨 일이야? 네 얼굴이… 안 좋아 보여.”
서연은 수진이 앉을 수 있도록 방석을 내어주었다. 수진은 마루 끝에 조심스럽게 앉더니, 들고 있던 가방을 무릎 위에 놓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정원만 바라보고 있었다. 봄바람이 흔드는 나뭇가지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서연아… 내가 너에게 전할 소식이 있어.”
수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그 조심스러움이 서연의 심장을 더욱 죄어왔다. 서연은 굳게 입을 다물고 수진을 바라보았다. 무슨 소식이든, 그녀를 다시 과거의 심연으로 끌고 갈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수진은 마침내 서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복잡한 감정으로 일렁였다. 연민, 안쓰러움, 그리고 결심.
“저번에, 그 아이가 떠났던 보육원 기억나지? 그곳이 재정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어.”
서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보육원. 그 이름은 그녀에게 언제나 잊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영원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열 살 때, 서연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던 아이를 그곳에 맡겼었다. 피를 나눈 동생이었다. 병약하고 작은 동생, 서진. 그녀는 매일 밤 꿈에서 서진의 작은 손을 잡았다 놓치는 악몽을 꾸었다.
“문… 닫는다고?”
서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지난 세월 동안 서진이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막연히 믿어왔다. 자신이 너무나 부족했기에, 그 아이를 더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고 싶다는 어리석은 소망을 품었었기에. 가끔 몰래 찾아가 멀리서 아이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커가는 뒷모습을 보며 눈물 흘리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응. 그래서 보육원에 있던 아이들이 다 다른 곳으로 옮겨지게 됐는데…”
수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낡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그 서류철은 마치 오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했다.
“서연아, 서진이가… 그 보육원에 없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서연의 귀는 멍해졌다. 봄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 소리, 새들의 지저귐,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수진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없었다니. 그럼 어디에? 설마…
“무슨 소리야, 수진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서연은 거의 절규하듯 물었다. 그녀의 심장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꼈다. 수진은 서류철을 펼쳤다. 그 안에는 오래된 기록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보육원 기록을 보니… 서진이는 십 년 전에, 네가 맡긴 지 얼마 안 되어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었더구나.”
수진의 목소리는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아득했다. 입양. 서진이가 입양되었다고? 그녀가 그렇게 애틋하게 몰래 지켜보던 뒷모습은, 서진이가 아니었다는 말인가? 십 년 동안, 그녀는 다른 아이를 서진이로 착각하며 눈물 흘려왔던 것인가?
서연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그녀는 지난 세월 동안 자신을 속여왔던 보육원의 거짓말, 그리고 자신이 애써 외면해왔던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는 듯했다. 차마 아이를 찾아올 용기가 없었고, 스스로 아이의 미래를 망칠까 두려워 발길을 멈췄던 어리석은 엄마. 아니, 언니.
“수진아… 그럼 서진이는… 어디로 간 거야? 누가 데려간 거야?”
수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서연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기록에 따르면, 아주 좋은 가정으로 갔다고 되어 있어.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부부에게 입양되었고, 서진이라는 이름 대신 ‘지우’라는 새 이름을 얻었어. 부부는 서진이의 건강 문제도 잘 보살펴 주었다고 해. 지금은 서진이가 스무 살이 되었으니… 어쩌면 너보다 더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몰라.”
수진의 말은 서연의 가슴에 깊은 파문으로 번져갔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그녀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동시에 깊은 죄책감과 후회를 안겨주었다.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자신의 아이는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삶은 어쩌면 그녀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는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우…”
서연은 그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봄바람은 여전히 창밖을 스치며 라일락 향기를 실어 날랐다. 그 향기는 이제 서연에게 새로운 종류의 고통과 함께, 묘한 희망을 전하는 듯했다. 그녀의 동생, 서진이가, ‘지우’라는 이름으로 잘 살고 있다는 소식. 그것은 십 년 만에 찾아온 가장 아픈 소식이었고, 동시에 가장 간절했던 소식이었다.
서연은 수진이 내민 서류철에서 한 장의 사진을 발견했다. 열 살 무렵의 서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웃고 있는 흐릿한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 아이는 자신의 동생이 맞았다. 그녀의 눈은 다시 한번 뜨거운 눈물로 흐려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슬픔만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줄기 따뜻한 빛이 그녀의 차가운 심장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수진은 서연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연은 사진을 든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아직 촉촉했지만, 그 안에는 십 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흔들림 없는 결의가 서려 있었다. 봄바람은 계속해서 불어와, 마루에 앉은 두 여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람은 서연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과거의 아픔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소식을 따라 나설 것인가.
서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찾아야지. 내 동생, 지우를.”
그녀의 목소리는 비록 작았지만, 그 어떤 결단보다도 단단하고 확고했다. 십 년의 침묵을 깨고,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서연의 삶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이제 막 푸른 싹을 틔우는 감나무처럼, 새로운 희망과 함께 미지의 길이 펼쳐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