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1038화

어스름한 달빛이 골목을 희미하게 비추는 시각, 정운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꿈을 파는 상점 앞에 섰다. 낡은 목재 문은 깊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조용히 그를 맞이했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자, 상점 안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하면서도 아련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유리병 속에 담긴 온갖 빛깔의 꿈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콤한 잠의 조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아련한 잔상, 잊혀진 모험의 짜릿함… 수천 가지 이야기가 숨 쉬는 공간이었다.

상점의 주인, 몽상가는 늘 그랬듯, 조용히 카운터 뒤에 앉아 차를 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정운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차분한 찻물이 찻잔에 채워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어서 오세요, 정운 님. 오늘도 그 꿈을 찾으러 오셨습니까?” 몽상가의 목소리는 잔잔한 물결 같았다. 너무나도 익숙한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정운의 대답도 늘 같았다.

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염원이 드리워져 있었다. “네, 몽상가님. 그때 그 꿈… 하윤이의 손을 잡았던 그 따스함, 웃음소리, 머리칼에서 나던 아기 냄새… 그 모든 것이 온전히 담긴 꿈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몇 번을 찾아왔지만, 매번 조금씩 달랐어요. 오늘은 완벽하게… 그때와 똑같이요.”

몽상가는 찻잔을 내려놓고 정운을 응시했다. 차분하던 그의 눈빛에 깊은 사색의 그림자가 스쳤다. “정운 님. 꿈과 기억은 시간의 강물과 같습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 같은 꿈을 온전히 다시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매 순간 새로운 경험과 감정에 의해 재구성되죠. 특히 사랑하는 이의 기억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움이 더해지고, 세월이 흐르면서 빛바래기도 하고, 또 다른 의미로 채워지기도 합니다.”

정운은 몽상가의 말을 이해하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날의 하윤이가 선명합니다. 그 아이가 처음으로 제 손을 잡았던 그 순간, 세상의 모든 행복이 제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어요. 그 감각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몽상가님이라면… 분명 가능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어린아이 같은 고집이 섞여 있었다.

몽상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운 님의 간절함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좋습니다. 오늘 정운 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하윤 님의 기억을 끄집어낸 꿈을 드릴 테니… 이번엔 조금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여 보십시오.”

몽상가는 진열장 깊숙한 곳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다른 꿈들처럼 화려한 빛을 발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따스한 기운이 느껴지는 병이었다. “이것은 하윤 님과의 기억을 담은 꿈입니다. 하지만 100% 재현은 어렵습니다. 정운 님의 오늘 감정이 이 꿈에 반영될 테니까요.”

정운은 병을 받아 들고, 익숙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병 속의 꿈은 은은한 분홍빛으로 반짝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윤… 내 아기. 그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그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꿈속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놀이터가 눈앞에 펼쳐졌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오후, 하윤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며 ‘아빠!’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운은 달려가 하윤이를 안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하윤이는 투명한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았다. 웃음소리도 희미했고, 손을 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듯했다. 하윤이의 작은 손이 손가락 끝에 닿을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간절히 원할수록 더욱 아득해지는 감각에 정운은 꿈속에서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소리 없는 절규를 내뱉으며 하윤이를 쫓았지만, 그녀는 언제나 한 걸음 앞에 있었다. 잡히지 않는 그림자처럼.

몸이 크게 흔들리며 정운은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몽상가의 차분한 얼굴이 보였다. 그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었어요. 또… 또렷하지 않았습니다. 손을 잡을 수 없었고, 웃음소리도 흐려졌어요. 왜… 왜 안 되는 거죠?” 그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했다.

몽상가는 조용히 손수건을 건넸다. “정운 님, 그것은 하윤 님이 멀어진 것이 아니라, 정운 님의 마음이 그때의 완벽함을 붙잡으려 애쓰기 때문입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순간, 그 기억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달아나려 합니다. 기억은 박제된 것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것이기에… 그것은 정운 님의 사랑으로 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정운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메마른 마음속에 몽상가의 말이 작은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말은 옳았다. 그는 완벽한 과거에 집착하느라, 지금 이 순간 하윤이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변하고 깊어졌는지를 외면하고 있었다.

“하윤 님의 온기를 느끼고 싶으시다면, 완벽한 재현의 꿈이 아니라, 하윤 님과의 사랑이 담긴 ‘위로의 꿈’을 선택해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 꿈은 특정 장면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하윤 님과의 모든 순간에서 느껴졌던 순수한 사랑과 평화를 전달할 것입니다. 기억이 주는 고통 대신, 사랑이 주는 따스함만을요.”

정운은 망설였다. 평생을 ‘그때 그 완벽함’을 좇아왔는데, 이제 와서 다른 길을 택하라니. 하지만 매번 실패했던 절망감과 몽상가의 깊은 눈빛이 그를 이끌었다. “위로의 꿈… 어떤 거죠?”

몽상가는 카운터 아래에서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듯 보이는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그 병은 너무나 맑아서 마치 공기가 담긴 것처럼 보였다. “이 꿈은 정운 님의 마음속에 있는 하윤 님에 대한 사랑의 본질을 찾아낼 것입니다. 기억의 잔상이 아니라, 정운 님 내면에 존재하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죠.”

정운은 병을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병은 아무런 빛도 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손 안에서 따스한 온기를 전해줄 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어떤 장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위로를 원했다. 하윤이에게서 오던 그 순수한 사랑을 느끼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환영 대신, 자신을 감싸 안는 진정한 온기를.

꿈속으로 스며들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놀이터도, 하윤이의 모습도 없었다. 하지만 온몸으로 느껴졌다. 온몸을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 그것은 하윤이의 체온 같기도 하고, 어릴 적 정운의 손을 잡았던 하윤이의 작은 손에서 전해지던 심장의 고동 같기도 했다. 콧속 가득 어린아이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차올랐고, 귓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기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했다. 눈앞에 하윤이의 모습이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운은 하윤이가 자신을 꼭 껴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통스럽게 잡으려 했던 과거의 환상이 아니라, 현재의 정운을 감싸 안는 영원한 사랑의 실체였다. 눈물이 또 흘렀지만, 이번에는 절망이 아닌 깊은 안도와 평화의 눈물이었다. 그의 메마른 가슴에 오랜만에 따뜻한 물결이 일렁였다. 하윤이는 떠났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다시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정운은 한참 후에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잔잔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 미소는 슬픔을 담고 있었지만, 동시에 깊은 이해와 평화를 머금고 있었다. “몽상가님… 감사합니다.”

몽상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찾으신 것 같군요, 정운 님. 가장 완벽한 꿈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요.”

정운은 그날 밤, 잃어버린 과거의 파편이 아닌, 현재 자신을 지탱하는 따스한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고 상점을 나섰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상점 문이 닫히고, 몽상가는 텅 빈 유리병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모든 꿈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