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안개가 걷히고 햇살이 대숲을 비집고 들어올 무렵, 박복만 이장님은 언제나처럼 이른 아침을 맞았다. 마당을 쓸던 손길이 잠시 멈춘 것은, 저 멀리 마을 어귀 느티나무 아래서 퍼져오는 희미한 소음 때문이었다. 짹짹거리는 참새 소리 같기도 하고, 어딘가 불안한 웅성거림 같기도 했다. 이장님은 허리에 찬 만물주머니를 습관처럼 한번 더 매만지고는, 낡았지만 튼튼한 장화를 신고 마을회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박 이장님의 하루는 늘 그랬다. 새벽의 고요함 속에서 예기치 않은 작은 파동을 감지하고, 그 파동이 마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리 헤아리는 것. 그게 이 서른 해 가까이 마을을 지켜온 이장님의 본능이자 숙명이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출렁이게 할까. 그의 발걸음은 늘 유쾌했지만, 그 속엔 언제나 마을을 향한 묵직한 사랑과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다다르자, 이장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벌써부터 김복순 할머니와 이만복 할아버지, 그리고 젊은 청년회장 동수가 느티나무 아래 모여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한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마을의 수호신이자 상징인,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였다. 푸른 잎사귀가 무성해야 할 한여름 길목인데, 유난히 잎이 누렇게 변색되고 힘없이 축 처진 가지들이 눈에 띄었다.
“이장님, 드디어 오셨구먼! 이 느티나무가 영 안 좋여. 어제저녁부터 잎 색깔이 이상하다 싶더니, 밤새 더 시들시들해졌어!” 김복순 할머니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은 애타게 느티나무의 거친 둥치를 쓸어내렸다. 이 느티나무는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마을을 지켜왔고, 할머니의 할머니, 또 그 할머니의 할머니도 이 나무 아래서 고된 삶의 시름을 달래고 즐거운 잔치를 벌였으리라.
이만복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여, 이장님. 이거 뭔가 단단히 병이 든 모양인디… 나무가 아프면 마을도 아픈 법인디, 큰일이여 큰일.”
느티나무는 단순히 나무가 아니었다. 이곳은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어르신들의 사랑방이었으며,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내어주는 포근한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가 늘 이 나무 아래서 시작되었고, 마을의 역사는 이 나무의 나이테와 함께 새겨져 있었다. 그런 느티나무가 아프다니,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박복만 이장님은 두말 않고 느티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키 큰 몸을 숙여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레 따 들여다보고, 둥치를 어루만지며 숨골을 살피듯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이내 특유의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에이, 어르신들! 아침부터 너무 심려 마십시오! 아직 숨골이 짱짱한디 뭘 그리 벌써부터 걱정이십니까!”
하지만 그의 눈빛은 진지했다. 유쾌함 뒤에는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냉철함이 있었다. “동수야, 청년회 비상 소집이다! 삽이랑 괭이 챙기고, 물통도 몇 개 가져와라!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이 나무 아래서 옛날이야기 좀 풀어주십시오. 나무도 귀 밝히면 다 듣고 힘을 내는 법이니까요!”
이장님의 지시에 청년회장 동수는 금세 청년 몇몇을 불러 모았다. 이장님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했다. 삽과 괭이로 나무 주변의 굳은 흙을 뒤집어주고, 혹시 모를 병충해 흔적을 살피는 동안, 김복순 할머니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옛이야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옛날 옛적에 말여, 이 느티나무가 지금보다 훨씬 작았을 때도 마을에 큰 가뭄이 들어서 다들 죽는다고 아우성이었는디… 그때 우리 증조할매가 이 나무 아래 묻힌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나무를 살리고 마을도 살렸다고 했어.”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법처럼 마을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우물이 있었을 리 없다고 생각했던 청년들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장님은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한편으로는 흙을 파내던 삽이 단단한 돌에 부딪히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할머니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오후가 되자, 느티나무 주변은 작은 전쟁터가 되었다. 청년들은 이장님의 진두지휘 아래 흙을 파내고 굳은 땅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 없었다. 이장님은 문득 파낸 흙더미 속에서 낡은 기왓장 조각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아래, 축축하고 깊은 곳에서 차가운 돌담의 감촉이 느껴졌다. “이거… 혹시 옛날 우물터가 맞나?”
그 순간, 김복순 할머니가 탄성을 질렀다. “맞여! 바로 그 자리여! 내가 어렸을 때도 할머니가 저 근처 땅속에 뭔가 있다고 말씀하셨지!”
이장님은 조심스럽게 파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슨 철제 뚜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뚜껑을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맑고 시원한 물이 고여 있는 작은 우물이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수십 년간 잊혀졌던, 전설로만 전해지던 느티나무 아래의 우물이 다시 세상 빛을 본 것이었다.
“이야, 진짜 우물이었네! 이장님 최고!” 젊은이들이 환호했고, 어르신들의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느티나무가 병든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잊혔던 생명수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였던 걸까.
이장님은 우물에서 물 한 바가지를 길어 올렸다. 흙냄새 섞인 시원한 물을 느티나무 둥치 주변에 뿌려주었다. 물줄기가 마른 흙에 스며들자, 마치 나무가 갈증을 해소하듯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을 사람들도 저마다 작은 양동이에 물을 길어와 나무 주변에 조심스럽게 부어주었다. 느티나무를 향한 온 마을의 사랑과 정성이 한데 모이는 순간이었다.
저녁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주홍빛 노을이 느티나무와 마을을 물들였다. 느티나무의 잎사귀는 아직 완전히 푸른빛을 되찾지 못했지만, 어쩐지 아침보다는 생기가 도는 듯했다. 그것은 비단 이장님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박복만 이장님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느티나무 아래서 막걸리 한 잔 해야겠구먼! 우리 마을 느티나무가 아팠다가 기운 차리는 데는, 역시 우리 마을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최고 명약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웃었다. 잊혔던 우물을 찾고, 느티나무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함께 땀 흘린 하루. 이장님은 느티나무를 다시 한번 올려다보았다. 나무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전보다 더 든든하고 포근하게 마을을 감싸 안는 듯했다. 유쾌한 이장님의 하루는 그렇게, 마을의 오래된 지혜와 따뜻한 마음이 함께 자라나는 희망으로 물들어갔다. 느티나무는 이제 다시 시작될 마을의 새로운 역사를 조용히 지켜볼 준비를 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