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의 눈은 창밖의 희뿌연 풍경에 고정되어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뺨을 스쳤다. 거실 한구석에는 반쯤 채워진 이삿짐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상자 안에는 낡은 사진첩과 빛바랜 털실 뭉치가 어지럽게 담겨 있었다. 손을 뻗어 만져보려다, 이내 허공에서 멈췄다. 물건 하나하나에 너무 많은 시간과 이야기가 엉겨 붙어 있어, 차마 쉽사리 담을 수가 없었다.
“하아…”
작은 한숨이 조용히 방 안을 채웠다. 미나의 곁에는 달이가 앉아 있었다. 햇살이 잘 드는 마루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주홍빛 눈동자로 미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달이. 녀석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깊고, 흔들림 없었다. 마치 미나의 마음속 모든 파도를 꿰뚫어 보는 듯한 고요함이었다.
“달아, 나… 정말 괜찮을까?”
미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달이는 대답 대신, 가느다란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그 몸짓 하나가 미나에게는 수많은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이 좁고 낡은 아파트는 달이가 처음 찾아왔던 그 순간부터 미나의 모든 것이었다. 힘겨웠던 날들을 버티게 해준 안식처이자, 달이와의 추억이 새겨진 성지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현실적인 이유들이 미나의 목을 짓눌렀다.
“새로운 곳이 더 넓고, 따뜻할 거야. 햇살도 더 잘 들고… 분명 너도 좋아할 거야. 그렇지?”
미나는 달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녀석은 부드럽게 미나의 손바닥에 제 머리를 비볐다. 그 온기는 미나의 불안한 심장을 토닥이는 듯했다. 달이는 미나의 손길을 한동안 즐기다, 문득 몸을 일으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윽한 눈빛으로 멀리 보이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응시했다. 마치 새로운 보금자리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듯이.
“어쩌면, 내가 이 집을 너무 붙잡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여기서 잃은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잃고 싶지 않은 것들도 너무 많고…”
미나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보냈고, 많은 꿈들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달이를 만났고,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법을 배웠다. 이 모든 감정들이 이 집의 벽돌 하나하나에 스며들어 있었다.
달이가 갑자기 작게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여느 고양이의 울음과는 달랐다. 깊은 울림이 있었고, 미나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마치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떠나는 것이 꼭 잃는 것은 아니야, 미나. 모든 것을 담아가는 것뿐.’
미나는 달이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녀석의 눈빛은 오래전, 미나가 가장 힘겨웠을 때 보여주었던 그 눈빛과 똑같았다. 그때 달이는 미나의 무릎에 기대어 하룻밤을 지새우며, 말없이 그녀의 슬픔을 나누어주었다. 그 침묵 속에서 미나는 비로소 다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응… 맞아.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괜찮을 거야.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미나는 달이를 품에 안았다. 녀석은 거부하지 않고 미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미나의 얼굴에 닿았다. 달이의 심장 박동이 미나의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강하고 꾸준한 생명의 리듬. 그것이 미나에게 가장 필요한 확신이었다.
“고마워, 달아.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미나는 달이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삿짐 상자를 다시 보았다. 아까와는 달리, 더 이상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담는 그릇처럼 보였다. 달이와 함께라면, 어떤 새로운 집도 곧 ‘우리 집’이 될 것이었다. 그곳이 어떤 모습이든, 달이의 따뜻한 눈빛이 비추는 곳이라면, 미나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미나는 달이를 안은 채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희뿌옇던 풍경 속에서, 멀리 지는 해가 마지막 주황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빛은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 따뜻하게 물들이는 듯했다. 새로운 계절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미나와 달이에게도,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