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047화

한여사님은 창가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살갰을 스치는 바람결이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솜털처럼 부드럽고, 갓 피어나는 새싹의 기운처럼 아련한 온기가 느껴졌다. 깊은 숨을 들이쉬자 흙냄새,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들판의 냄새, 그리고 저 멀리 언덕배기에서 피어나는 진달래꽃의 여린 향기가 그녀의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봄이었다. 가혹했던 겨울의 앙상한 가지 끝에서도 생명의 기적을 피워 올리는, 언제나 희망을 속삭이는 계절이었다.

“벌써 이렇게 됐네.”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시간의 흐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다. 한때는 온몸에 활기가 넘쳐흐르던 청춘이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집안이 늘 북적이던 젊은 어머니였다. 이제는 주름이 깊게 패인 손으로 찻잔을 쥐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결에도 지난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노인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은 마당 한켠의 오래된 감나무를 향했다. 앙상했던 가지마다 연둣빛 물이 오르고, 곧 작은 잎들이 파릇하게 돋아날 참이었다. 그 나무를 볼 때마다 그녀는 늘 그리운 얼굴 하나를 떠올리곤 했다.

지훈. 그녀의 막내아들. 한여사님의 삶에서 가장 빛나고도 가장 아픈 이름이었다. 그는 늘 봄과 함께였다. 봄에 태어났고, 봄에 처음 걸음마를 뗐으며, 봄이면 작은 흙손으로 마당의 흙을 파헤치며 씨앗을 심곤 했다. 그리고… 가장 가슴 아픈 봄날, 그는 말없이 떠나갔다. 햇수로 벌써 십 년이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녀의 가슴 한쪽에는 늘 메마른 흙먼지가 쌓여 있었다. 지훈에게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었다. 그를 탓할 수만은 없는 복잡한 가족사가 얽혀 있었다. 그래서 더욱 아팠다. 차라리 원망할 수라도 있다면 나을 터인데, 그럴 수도 없으니 그저 속으로만 삭일 뿐이었다.

따스한 봄바람이 열린 창문 틈으로 들어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마치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람은 방 안을 한 바퀴 휘감더니, 그녀의 오래된 사진 액자를 건드렸다. 낡은 액자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지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손에 작은 새싹 하나를 들고, 흙투성이가 된 얼굴로 환하게 웃던 그 아이. 그 웃음은 여전히 그녀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오랫동안 지훈의 소식은 뜸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이라 해도, 늘 그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간접적인 이야기들뿐이었다. 잘 살고 있을까. 밥은 제때 먹고 다니는지. 혹시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그녀의 마음은 늘 불안한 질문들로 가득했다. 봄바람이 전해준다는 소식은 늘 그런 그녀의 애타는 마음을 달래주는 허상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 이 봄바람은 조금 달랐다.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더 촉촉하고, 왠지 모르게 더 깊은 울림을 가지고 그녀의 가슴을 두드렸다.

문득, 마당 쪽에서 경쾌한 지저귐이 들려왔다. 한여사님은 눈을 뜨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나무 가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재잘거리고 있었다. 어둠침침한 깃털에 노란 부리, 그리고 통통한 몸집. 저 새는… 그렇다, 매년 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랑지빠귀였다. 그녀는 노랑지빠귀가 오면 비로소 진정한 봄이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새는 늘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었다. 잊고 있던 옛 친구의 편지,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 어쩐지 오늘따라 그 노랑지빠귀의 지저귐이 더욱 힘차고 명랑하게 들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낡은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여사님은 순간 놀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누가 이 시간에… 늘 그래왔듯, 보이스피싱이거나 알 수 없는 광고 전화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화기를 드는 그녀의 손끝은 왠지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이 솟아올랐다.

“여보세요.”

낮게 깔린 그녀의 목소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수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의 오랜 친구이자 그녀와도 가깝게 지냈던 동네 아줌마, 정순이었다. 정순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껏 들떠 있었다.

“한여사님! 저 정순이에요! 마침 집에 계셨네요!”

“정순아, 웬일이니? 목소리가 왜 그래?”

한여사님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정순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글쎄, 제가 방금 지훈이한테 연락을 받았지 뭐예요! 지훈이가… 드디어 여기로 돌아온대요!”

그 순간, 한여사님의 손에서 수화기가 떨어질 뻔했다.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가 다시 격렬하게 솟구치는 것 같았다. 지훈이… 돌아온다고? 그녀의 귀를 의심했다. 지난 십 년간 수도 없이 꿈꾸고 바라왔던 그 소식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이야.

“돌아온다고? 정말이니? 지훈이가… 정말 돌아온다고?”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창문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눈물처럼 느껴졌다.

“네! 이번 달 말쯤에요! 지난 몇 년간 정말 고생 많았대요. 사업도 잘 안 되고, 몸도 안 좋아서 정말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번에 다 정리하고 완전히 돌아오기로 결심했대요. 엄마 보고 싶다고… 엄마 봄 정원은 잘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정순의 목소리에서 지훈의 안녕이 그대로 전해졌다. 엄마 봄 정원. 어린 시절, 지훈이 심어 놓은 작은 씨앗들이 해마다 꽃을 피우던 그 정원. 그 정원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지훈을 기다리는 희망의 상징이었다.

“엄마 보고 싶다고… 엄마 봄 정원은 잘 있느냐고…”

그 몇 마디에 그녀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어린 아들이 투정을 부리듯 내뱉던 그 말이, 이제는 그리움과 후회의 무게를 싣고 그녀에게 날아왔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기쁨의 눈물, 안도의 눈물, 그리고 지난 세월의 아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해묵은 눈물이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한여사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랑지빠귀는 여전히 감나무 가지에서 경쾌하게 노래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작은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잊고 있던 작은 꽃잎들이 고개를 내밀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 모든 풍경이 한여사님에게는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더 이상 외로움과 기다림의 풍경이 아니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희망과 재회의 서곡이었다.

봄바람은 그녀의 마른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단순히 지훈의 귀환을 알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세월의 아픔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생명의 숨결이었다. 십 년의 긴 겨울이 지나고, 비로소 그녀의 마음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러나 힘찬 미소를 지었다. 이제 봄은 더 이상 혼자만의 계절이 아니었다. 다시 찾아올 아들과 함께 맞이할, 진정한 희망의 계절이었다.

창문 밖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이제는 슬픔이 아닌, 기쁨과 새로운 기대가 가득 찬 이야기들을 전하며. 제1047화의 마지막 페이지는 그렇게, 따뜻한 바람과 함께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