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비, 한 줄기 희망
강형사는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492번째의 밤. 헤아릴 수 없는 날들 동안 쫓아온 그림자, 그 첫사랑의 희미한 흔적은 오늘따라 더욱 멀게 느껴졌다. 차 안은 습기와 지친 한숨으로 가득했다. 앞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들이 회색빛 도시 풍경을 일그러뜨렸다. 마치 그의 지난 세월처럼 불분명하고 답답했다.
그는 한 낡은 공방 앞에 차를 세웠다. 정보원의 손에 들려 있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그를 이곳까지 이끌었다. 사진 속에는 20년 전 지수가 직접 만들었다던 작은 도자기가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도자기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지수만의 독특한 물결무늬 패턴. 너무나 희미하고 사소해서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을, 그러나 강형사에게는 그 어떤 단서보다 선명한 그녀의 흔적이었다.
공방 문을 열자 흙냄새와 나무 타는 냄새가 섞인 오래된 향이 코끝을 스쳤다. 백발의 박선생이 휠체어에 앉아 희미한 작업등 아래서 굽이진 목공예품을 다듬고 있었다. 강형사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지수의 이름을 꺼내자, 박선생의 눈빛에 찰나의 흔들림이 스쳤다. 오랜 침묵 끝에 박선생은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지수… 그 아이는 참 재주가 많았지. 특히 그 물결무늬, 본인만의 독특한 문양이라며 좋아했어. 다른 아이들은 따라 하려 해도 도무지 똑같이 나올 수가 없었지. 섬세하면서도 강단 있는, 꼭 그 아이 같았어.”
강형사의 심장이 다시금 잊었던 박동을 시작했다. 박선생은 한참을 더듬거리다 기억 저편에서 꺼낸 듯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이 근처 복지관에서 작은 자선 바자회가 열렸을 때… 지수가 만들었던 작품 몇 점이 기증되어 나왔던 것 같아. 아주 오래된 것들이었지.”
강형사는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지수가 만들었던 작품. 그것도 ‘물결무늬’가 새겨진. 그는 즉시 복지관으로 향했다. 이미 어둑해진 저녁이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복지관 자료실에서 바자회 기록을 찾아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낡은 기록철에서 발견된 한 줄의 문장.
‘푸른 파도 문양의 작은 도자기, 00시 00동의 한 독지가에게 낙찰.’
푸른 파도 문양. 지수만의 물결무늬를 그렇게 표현한 것이 분명했다. 그 뒤에 이어진 낙찰자의 이름과 주소를 확인하는 순간, 강형사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이름은 그가 수많은 자료를 뒤져왔던 시간 속에서도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전혀 새로운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 주소는… 예상치 못했던, 그러나 묘하게 익숙한 곳이었다. 그가 수십 년 전, 지수와 함께 미래를 꿈꾸며 이야기를 나누던 동네의 끝자락이었다.
강형사는 자료실을 나와 밤거리를 뚫고 차에 올랐다. 빗방울은 여전히 창문을 때리고 있었지만, 이제 그 소리는 더 이상 절망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장 속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희망의 전주곡이었다. 손에 쥐어진, 낡은 종이에 적힌 새로운 이름과 주소. 492번째의 밤. 강형사는 이제, 어쩌면 그녀의 숨결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액셀을 밟았다. 망설임 없이, 오직 한 곳을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