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069화

새벽녘, 창밖으로 첫눈이 스며들 듯 내리고 있었다. 하얀 손길이 세상의 모든 모난 것을 부드럽게 덮어가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하윤은 따뜻한 차가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흩날리는 눈발을 응시했다. 해가 뜨고,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눈송이들은 거대한 백색의 천막처럼 하늘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첫눈이 아니라, 이미 깊은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듯한 함박눈이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나무 펜던트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미미하게 온기를 품고 있었다. 어린 시절 지우가 직접 깎아 만들어 주었던 조약한 물건. 펜던트의 한쪽 면에는 서툰 솜씨로 새겨진 오래된 고목의 형상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희미하게 새겨진 두 글자, ‘약속’이 남아있었다. 매년 겨울, 첫눈이 내릴 때마다 이 펜던트는 그녀의 심장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지우와의 마지막 약속.

“하윤아, 또 그러고 있니.”

뒤에서 들려오는 은서의 목소리에 하윤은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따뜻한 차를 다시 내린 은서가 그녀의 옆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하윤을 바라보았다. 은서는 어린 시절부터 하윤의 곁을 지켜온 유일한 가족 같은 존재였다.

“벌써 이렇게 됐네요. 시간이 참 빨라요.” 하윤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벌써 스무 번의 겨울이 왔어요.”

스무 해 전, 그날도 이렇듯 세상이 온통 흰 눈으로 뒤덮였었다. 아직 채 여물지 못한 어린 하윤과 지우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숲속을 헤치고 달렸다. 지우는 아버지를 따라 먼 타지로 떠나야 했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하윤은 세상을 잃은 듯 울었고, 지우는 그런 그녀를 달래며 가장 깊은 숲 속에 있는 ‘약속의 나무’ 아래로 데려갔다. 그 나무는 마을의 전설처럼 수백 년을 살아온 거대한 느티나무로, 그 웅장한 가지는 마치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했다.

***

“하윤아, 울지 마. 나 꼭 다시 올 거야.”

어린 지우는 눈물 범벅이 된 하윤의 뺨을 서툰 손으로 닦아주었다. 그의 작은 손바닥은 눈송이처럼 차가웠지만, 눈빛만은 굳건했다.

“어떻게 알아? 네가 나 잊어버리면 어떡해?”

“절대 안 잊어! 봐, 이거.” 지우는 품속에서 막 깎다 만 나무 펜던트를 꺼내 하윤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 세상에 첫 겨울 눈꽃이 깊게 쌓이는 날, 우리 다시 이 약속의 나무 아래서 만나자. 그땐 절대로 헤어지지 않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어린 마음에도 ‘무슨 일이 있어도’라는 말의 무게를 알았다. 그저 만나자는 흔한 약속이 아니었다. 그들의 순수하고도 절박한 소망이 그 눈꽃 속에 새겨져 있었다. 함박눈은 그들의 어깨 위에 소복이 쌓였고, 그들의 작은 발자국은 곧 새하얀 눈에 덮여 사라졌다. 지우의 뒷모습은 점점 희미해져 갔고, 하윤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펜던트를 꼭 쥐었다.

***

“아직도 지우를 기다리니?” 은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하윤의 손에 들린 펜던트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스무 해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야. 너무 오랫동안 기다린 건 아닐까.”

하윤은 고개를 저었다. “기다린 게 아니에요. 그냥… 이 약속이 제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뿐이에요. 지우가 돌아오지 않아도, 약속 자체가 저를 지탱해 줬던 것 같아요.”

하윤은 고서적 복원가로 일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은 종이와 글자를 어루만지며 과거의 이야기들을 복원하는 일. 어쩌면 그 일은 그녀가 지우와의 약속이라는 과거를 끊임없이 어루만지고 복원하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였는지도 몰랐다. 먼지 쌓인 페이지 속에서 잊힌 시간을 찾아내는 것처럼, 그녀는 지우와의 약속 속에서 잊힌 자신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낡은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는 ‘태호’. 지우, 하윤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유일하게 약속의 나무 아래 기억을 공유하는 친구였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하윤아,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태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유쾌했지만,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응, 태호야. 무슨 일 있어?” 하윤은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 사실은… 얼마 전, 한 노인 분에게서 연락이 왔어. 지우에 관한 건데… 그분이 지우의 아버지와 교분이 깊으셨던 분인데, 지우가 한 달 전쯤 고국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하더라고.”

하윤의 손에서 펜던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무 해 동안 굳건히 버텨왔던 마음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듯했다. 돌아왔다니. 지우가. 정말로?

“정말이야? 어디에 있는데? 그 노인 분은 또 누구고? 어떻게… 왜 이제야…” 하윤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분은 ‘푸른 도서관’의 관장님이라고 하셨어. 지우가 돌아오긴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어. 어쩌면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태호의 말이 뜸해졌다.

푸른 도서관. 그곳은 지우와 하윤이 어린 시절 함께 꿈꾸었던 고서적과 전설을 탐구하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지우는 늘 언젠가 그곳의 모든 책을 다 읽어낼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했던, ‘숲의 심장을 가리키는 지팡이’라는 오래된 전설이 담긴 책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보물이었다.

하윤은 펜던트를 주워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스무 해를 기다려온 약속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그 기대가 가져올 미지의 두려움이 뒤섞였다. 밖은 여전히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지우가 떠나던 그날처럼,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하윤아, 어디 가는 거야?” 은서가 서둘러 물었다.

하윤은 이미 코트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망설임 없이 창밖의 설원을 향해 있었다. “약속의 나무에요. 지금 당장 가봐야겠어요.”

은서는 하윤의 손목을 잡았다. “하지만 저 눈보라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차라리 날이 밝으면…”

“안 돼요, 은서 언니.” 하윤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약속은, 이 눈이 내리는 날에 지켜져야 해요. 이 눈이 깊게 쌓이는 날… 지우가 돌아왔다면, 분명 그곳으로 갈 거예요. 그곳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녀는 오래된 부츠 끈을 단단히 묶고, 목도리를 얼굴에 칭칭 감았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지우는 이미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스무 해 동안의 침묵을 깨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눈보라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이 그녀의 걸음을 방해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펜던트를 꼭 쥐고, 오직 약속의 나무가 있는 숲의 가장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점점 더 깊은 숲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눈 쌓인 길은 더욱 희미해졌다. 바람은 나뭇가지 사이를 휘감으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하윤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이, 지우와의 마지막 순간이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는 드디어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느티나무의 윤곽을 발견했다. 눈으로 뒤덮인 그 모습은 마치 하얀 망토를 두른 신비로운 거인 같았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너무나 익숙한 그 실루엣. 그 아래에, 정말로 지우가 있을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녀의 심장은 더 빠르게 고동쳤다. 나무의 굵은 줄기 주위로 눈이 가장 깊게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흐릿한 인영 하나가 보였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한 뒷모습. 그 사람은 눈송이가 쌓인 나무 줄기에 기대어, 그녀가 어린 시절과 똑같이 펜던트를 매달아 놓았던 가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윤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발걸음을 떼기가 힘들었다. 저 사람이 정말 지우라면, 스무 해 동안 기다려온 순간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라면… 그녀는 두려웠다. 너무나 오랜 꿈이었기에, 현실이 되었을 때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때, 그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굵은 눈발 사이로, 희미하게 그 얼굴이 드러났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낯익은 듯 낯선 얼굴. 그의 눈빛은 깊은 회한과 오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하윤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하윤아…”

메마른 그의 목소리가 눈보라 속을 뚫고 그녀에게 닿았다. 스무 해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목소리. 하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차가운 눈송이가 그 눈물과 뒤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