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파는 상점 – 제1074화

안개가 짙게 깔린 새벽녘, 모든 도시의 불빛이 침묵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골목길 끝, 낡은 나무 문이 하나 있었다. 문 위에는 닳아버린 붓글씨로 ‘꿈을 파는 상점’이라 적혀 있었고, 그 글자 위로 은은한 달빛 대신 별들의 잔해 같은 빛이 부유했다. 1074번째 새벽이었다.

상점 안은 언제나처럼 정적과 함께 묵직한 향기가 가득했다. 시간을 잊은 듯한 낡은 서가에는 유리병들이 촘촘히 진열되어 있었는데, 각 병 안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구슬이나 작은 연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누군가의 간절한 염원, 잊고 싶었던 과거, 혹은 차마 닿을 수 없는 미래였다. 상점의 주인, 백야는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몽롱한 눈빛으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 모든 인간의 꿈을 지켜봐 온 자의 피로함과 미묘한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발걸음을 했다. 어떤 이는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 어떤 이는 이루지 못한 꿈을 한 조각이라도 맛보기 위해. 그러나 오늘, 백야의 앞에 선 이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연희 할머니는 쭈글쭈글한 손으로 낡은 목도리를 꼭 쥐고 상점 문턱을 조심스레 넘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일렁였다.

“백야님…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백야는 고개를 돌려 할머니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별처럼 깊었지만, 그 속에는 오랜 세월 모든 인간의 꿈을 지켜봐 온 자의 피로함이 서려 있었다.

“오셨군요, 연희님. 오늘은… 어떤 꿈을 찾으십니까?”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꿈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제 더는 제 꿈을 사고 싶지 않아요. 그저…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백야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먼지 낀 공기마저 무게를 가지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할머니의 굳게 다문 입술과 떨리는 손끝에 머물렀다. 그는 이미 할머니가 무엇 때문에 이곳까지 찾아왔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꿈은 파는 것보다 더 큰 책임을 동반하는 법이었으니까.

“기억하십니까? 몇 년 전… 제 손녀, 수아가 이곳을 찾아왔던 것을요.”

백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수아님… 기억합니다. 그녀는… ‘완벽한 미래’를 샀지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으로부터 그녀를 격리시킬, 가장 찬란한 허상이었습니다.”

그때 수아는 현실의 가혹함에 지쳐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모든 희망이 사그라진 듯한 나날 속에서 그녀는 백야에게 찾아와 가장 찬란한 꿈을 요구했다.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해 줄, 오직 행복으로만 채워진 미래의 파편을. 그리고 백야는 그녀에게 가장 아름다운 꿈을 병에 담아주었다. 그 꿈은 수아에게는 구원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 꿈… 수아에게 정말 행복을 주었을까요?” 연희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요즘… 이상한 꿈을 꿉니다. 수아가 샀던 그 꿈의 조각들 같아요. 아름답지만… 어딘가 섬뜩한… 뒤틀린 풍경들이요.”

백야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꿈의 잔상은… 때때로 주변의 가까운 이들에게 스며들기도 합니다. 특히 그 꿈이 너무나 강렬하고,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면 말이죠. 감정적인 연결고리가 강할수록 그 잔상은 더욱 짙게 남습니다.”

“단순한 잔상이 아닙니다!” 할머니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쭈글쭈글한 얼굴에 희미한 붉은 기가 돌았다. “저는 그 꿈속에서 수아의 웃음소리를 듣습니다. 완벽하게 행복해 보이는 수아의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그 뒤틀린 풍경들 속에서 저는… 제 손녀가 아닌 다른 존재의 그림자를 봅니다. 그 그림자는 마치… 수아의 행복을 집어삼키는 듯해요.”

백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유리병들이 가득한 서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그의 손이 멈춘 곳은 어느 작은 병이었다. 그 병 안에는 푸른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수아가 샀던 ‘완벽한 미래’의 잔상이었다. 그러나 그 빛은 평소보다 훨씬 강렬했고, 마치 병을 뚫고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병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할머니가 보신 것은… 단순히 잔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백야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수아님이 꾼 꿈은… 너무나 완벽했습니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한 완벽한 도피처였지요. 하지만… 현실을 완벽하게 배제한 꿈은 때때로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것들을 희생시킵니다.”

“희생이라니요?” 연희 할머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 손녀가… 어떤 희생을 치렀다는 말씀이십니까? 제 수아가… 위험하다는 말입니까?”

백야는 병을 응시하며 말했다. “완벽한 행복은… 그 자체로 가장 위험한 허상입니다. 현실과 완전히 단절된 행복은 불안정하며, 결국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만들어내지요. 수아님의 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 합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외부의 진실은 그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니까요.”

“그럼 수아는… 그 꿈속에 갇혀버린 것입니까? 아니면… 그 꿈이 수아를 집어삼킨 것입니까?”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제가 보았던 그림자… 그게 혹시… 꿈의 상점에서 말했던… ‘꿈의 대가’입니까?”

백야는 병을 내려놓고 할머니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연희님… 저는 꿈을 파는 자이지, 꿈에서 깨우는 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수아님의 꿈이 흘러나오는 현상은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꿈 속 세계가 점차 현실의 경계를 침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듯이요.”

“무슨 뜻입니까? 제 손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입니까?”

“수아님은… 자신의 꿈 속 세계에서 완벽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점점 더 강해지고, 점차 그 세계를 ‘진실’로 믿게 만들겠지요. 외부의 간섭은… 그 세계를 위협하는 ‘침입자’로 인식될 겁니다. 심지어… 자신의 사랑하는 이가 찾아간다 해도 말입니다.”

“제가… 제가 수아를 구할 방법은 없습니까?” 할머니는 백야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간절함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모든 두려움을 넘어선 듯 절박하게 빛났다.

백야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꿈의 상점은… 꿈을 사는 이에게는 문을 열지만, 꿈을 깨우려는 이에게는 닫혀 있습니다. 이곳의 존재 목적은 ‘꿈’ 자체에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할머니의 눈에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어떤 방법이든 좋습니다! 제발… 제 손녀를 돌려주세요! 이 늙은이에게 남은 것은 수아 하나뿐입니다!”

백야는 다시 그 푸른빛 병을 집어 들었다. 병 안의 빛은 이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무언가가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혹은 반대로 침입자를 거부하는 것처럼 요동쳤다. “수아님의 꿈은… 이미 스스로의 주인을 넘어섰습니다. 마치 독립된 인격처럼 말이죠. 그 안에 들어가 그녀를 깨우려면… 당신 스스로도 그 꿈의 일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 또한 그 완벽한 허상에 사로잡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백야의 말은 가시 박힌 칼날 같았다. 할머니는 그 위험을 직감했지만, 손녀를 향한 사랑은 그 모든 두려움을 삼키고도 남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수아의 모습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 찼다. 그녀에게 더 이상 잃을 것은 없었다.

“길을 잃어도 좋습니다. 돌아오지 못해도 좋습니다. 수아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백야는 할머니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수천 개의 별이 명멸하는 듯했다. 그는 할머니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단단한 사랑을 보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연희님. 당신이 들어가려는 곳은… 수아님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가장 견고한 감옥입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기억조차도 당신을 배신할지 모릅니다. 당신이 수아를 찾아낸다 해도, 그녀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는 병마개를 열고, 푸른빛 안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안개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유려하게 흘러 할머니의 심장을 향해 스며들었다. 할머니의 몸이 투명해지는 듯하더니, 이내 연기처럼 희미해졌다. 백야는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텅 비어버린 상점 안, 푸른빛 잔상만이 아직 공중에 남아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1074번째 새벽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이, 현실의 경계를 넘어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였다.

백야는 고요히 병을 다시 닫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회한이 스쳤다. 꿈을 파는 상점의 주인은… 때때로 꿈을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선택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파는 자와 사는 자 모두에게 더 잔인한 싸움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