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은 차가운 금속 시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쥔 시계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의 도구가 아닌, 모든 것을 앗아간 저주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낡고 바랜 가죽 끈과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인 다이얼 위로, 그의 불안한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창밖으로는 밤새 내린 비가 젖은 거리를 더욱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속 풍경처럼.
서연의 창백한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희미하게 웃던 그녀의 모습, 그 웃음 뒤에 감춰진 알 수 없는 공허함이 이현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이번이 몇 번째였더라. 그녀를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것이. 단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것을 잃을까 두려워,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이 시계와 함께 보냈다. 처음에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그녀를 구하기 위함이었고, 다음은 고열에 시달리는 그녀의 병을 돌리기 위함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매번, 더 큰 재앙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기억의 파편들
“이현아, 있잖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며칠 전,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그 말이 이현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지만, 그 시선 속에는 이현이 알지 못하는 낯선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현은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네가 길 잃은 강아지를 도와주다 넘어져서 무릎이 다 까졌잖아. 내가 밴드를 붙여줬고.”
서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랬나? 나는… 그냥 네가 횡단보도 앞에서 쩔쩔매는 날 보고 먼저 말을 걸어준 줄 알았는데.”
그녀의 기억은 이제 이현의 기억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아주 미세한 균열이었다. 하지만 그 균열은 시간이 되돌려질 때마다 조금씩 벌어졌고, 이제는 이현이 알고 있는 서연의 과거와는 너무나 다른, 낯선 서연의 과거가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서연을 살리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지만, 정작 ‘그녀’를 이루고 있던 기억의 조각들은 매번 다른 형태로 재조합되었다.
그녀의 병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의사는 ‘이유 없는 심장 기능 저하’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현은 알았다. 그것은 이유 없는 병이 아니었다. 시간을 거스른 대가였다. 무수히 많은 과거의 서연들이 현재의 서연에게 알 수 없는 형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 한, 서연의 심장은 계속해서 비명을 지를 것이었다.
멈출 수 없는 시계, 멈출 수 없는 고통
가장 최근에 시간을 되돌린 것은 한 달 전이었다. 서연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였다. 이현은 주저 없이 시계의 용두를 돌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은 역행했고, 그는 사고가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서연을 구해냈다. 그녀는 살았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이현과의 첫 만남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의 심장은 더욱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현은 거울 앞에 섰다. 초췌한 얼굴, 깊어진 눈가의 주름,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눈빛. 그는 이제 더 이상 젊은 시절의 열정적인 청년이 아니었다. 서연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는 스스로를 파괴해왔다. 시간을 되돌릴 때마다 그의 육체와 정신도 함께 마모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가 사랑했던 서연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낯선 존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현을 보면 행복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이현이 알던 서연의 행복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이현이 주입한, 어딘가 어긋난 기억들이 만들어낸 공허한 행복만이 존재했다.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감히 그녀에게, ‘너의 기억은 내가 만든 것이며, 너의 존재는 내가 수없이 깎아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심장 박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벽에 걸린 달력을 보았다. 오늘 밤 12시. 그것은 그녀의 생명과 직결된 마지막 순간이었다. 의사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그의 손에 든 시계만이 유일한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리면, 그녀는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이번에는 어떤 기억을 잃을까? 이현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서연’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현의 손에서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의 영혼은, 이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기억의 파편들 사이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시계의 초침 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째깍, 째깍. 1초가 흐를 때마다 그의 심장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그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이제는 그녀를 놓아줄 것인가. 그녀의 영혼이 더 이상 그의 이기적인 사랑 때문에 고통받지 않도록.
이현은 천천히 시계의 용두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지막 기회, 혹은 마지막 파멸. 그의 눈동자에 그녀의 환영이 아른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순수했던 서연, 그의 곁에서 환하게 웃던 서연, 그리고 이제는 낯설어져 가는 슬픈 눈빛의 서연.
그는 서연의 기억을 되살려줄 수 없었다. 그녀의 심장을 되돌릴 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온전한 ‘자신’을 되돌려줄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의 본질을 끊임없이 침식해왔다.
이현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시계가 무겁게 느껴졌다. 이 무거운 시계는, 이제 그의 마지막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는 자는, 결국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그 해답은, 차갑게 흐르는 시간 속에 영원히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