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어버린 시간 여행자 – 제1061화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 먼지 쌓인 공기는 텅 빈 시간의 무게를 머금고 있었다. 리안은 낡은 금속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섰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침묵을 깨트렸다. 이곳은 고대 문명의 마지막 숨결이 닿은 천문대이자, 그녀가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찾아 헤매는 여정의 또 다른 쉼터였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이 벽을 스치자, 빛바랜 성도(星圖)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들의 흐름, 잊혀진 행성들의 궤적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한 지점을 좇고 있었다. 바로 ‘잊혀진 별자리’였다.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떠돌며, 리안은 오직 이 별자리의 형상만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어린 시절의 장난스러운 꿈처럼, 혹은 사라진 사랑의 맹세처럼. 그것은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뿌리 박힌, 유일한 이정표였다.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그녀의 의식을 할퀴었지만, 이 별자리만은 온전한 형상으로 남아 그녀를 이끌었다.

거대한 관측 장치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다. 녹슨 강철과 부식된 회로가 얽혀 마치 거대한 괴물의 뼈대 같았다. 그녀는 손전등을 든 손으로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 장치가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랐다. 먼지 쌓인 제어판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딱딱하게 굳은 버튼들,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아무도 만지지 않았을 침묵이 흐르는 곳이었다.

“제발….”

목이 메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낡은 은빛 로켓을 꺼냈다. 손바닥에 꼭 쥐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전해졌다. 로켓의 표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잊혀진 별자리가 새겨져 있었다. 과거의 어떤 순간, 누군가가 그녀에게 주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로켓이 작동의 열쇠일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그녀를 지배했다. 제어판의 한 부분을 누르자, 로켓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진 홈이 나타났다. 망설임 없이 로켓을 홈에 끼워 넣었다.

‘딸깍’

오랜 침묵을 깨는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이내 희미한 불빛이 회로를 따라 흐르기 시작했고, 거대한 관측 장치가 낮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먼지가 공중으로 흩날리고, 낡은 모니터 패널에 고대 문자들이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화면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이내, 한 줄기 섬광이 그녀의 시야를 강타했다.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차가운 금속 계단은 사라지고, 부드러운 풀밭의 감촉이 발끝에 닿았다. 밤하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투명했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그녀의 머리 위에서 쏟아질 듯 반짝였다. 그리고 그곳에… 그가 있었다.

“리안, 여기야.”

익숙하면서도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 카이. 그의 미소는 별빛보다 밝았고, 그의 눈빛은 우주보다 깊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밤하늘을 가리켰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그녀의 손에 딱 맞았다. 잊혀진 지 오래인 평온함이 그녀를 감쌌다. 함께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별자리가 보여? ‘잊혀진 별자리’라고 불려. 아주 오래된 전설에 나오는 별자리인데, 시공간을 여행하는 자들의 길을 밝혀준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꿈결처럼 아득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림이 느껴졌다.

“우리가 헤어져도, 네가 길을 잃어도, 이 별자리를 보면 다시 날 찾을 수 있을 거야. 내가… 널 위해 만들어 놓은 이정표니까.”

그는 그녀의 목에 은빛 로켓을 걸어주었다. 그 로켓은 지금 그녀의 손에 쥐여 있는 것과 똑같았다. 차가운 금속이 그녀의 심장 위에서 따뜻하게 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약속해 줘, 리안.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찾아올게. 그리고 네가 날 잊어도, 난 항상 널 기억할 거야.”

그녀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왜 이 순간이 이렇게 슬프고 아픈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의 눈빛에서 사라져가는 슬픈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거대한 폭발음이 귓가를 강타하고, 세상이 순식간에 혼돈의 빛으로 물들었다.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그녀를 밀치며 소리쳤다.

“도망쳐, 리안! 기억해, 제발 기억해…!”

그의 손이 놓아지고, 그녀는 허공으로 내던져졌다. 폭발의 충격과 함께 그녀의 시야는 암전되었다. 아득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그의 미소를, 그리고 잊혀진 별자리의 반짝임을 보았다.

“카이…!”

리안은 비명을 지르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손에 쥐여 있던 로켓은 마치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관측 장치의 모니터는 여전히 번쩍이고 있었지만, 화면에는 방금 본 것과는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고대 문자와 함께, 한 문장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기억의 봉인은 풀렸으나, 시간의 균열은 시작되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먼지 쌓인 천문대, 낡은 장치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예전의 리안이 아니었다. 그녀는 카이를 기억했다. 그들의 약속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을 봉인하고, 카이를 사라지게 한 그 폭발의 배후에 무언가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로켓이 더욱 뜨거워졌다. 그리고 그 빛이 그녀의 손을 넘어 천문대의 벽을 비추는 순간,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낡은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거대한 비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길을 잃었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시간 여행자였다.

그녀가 통로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때, 통로의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그림자 같은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금속음이 울리고, 날카로운 빛이 어둠을 갈랐다. 그 그림자의 손에는 그녀를 향한 듯한 에너지 블레이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이내, 나지막하면서도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시간 여행자. 그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줄이야. 하지만 결국, 그 기억이 너를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빛이 없는 공간에서 두 개의 섬광이 마주쳤다. 하나의 섬광은 희미한 희망을 담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적의를 품고 있었다. 카이의 미소와 그의 마지막 외침이 리안의 뇌리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녀는 주춤거리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 알았다. 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