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서고의 공기는 늘 지훈의 폐부를 짓눌렀다. 수십 년 묵은 종이와 먼지의 냄새, 희미하게 빛바랜 기억들이 엉겨 붙은 듯한 그 무게는 마치 잊힌 시간 그 자체 같았다. 508번째 아침, 그 냄새는 유독 더 지독하게 느껴졌다. 어젯밤 꿈에 서연이 나왔기 때문일까.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변치 않은 그 미소.
탁자 위에는 낡은 파일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었다. 지난 몇 주간 그는 이 고색창연한 사립학교 기록보관소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서연이 잠시 머물렀던 적 있다는,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한 작은 마을의 이름. 그 단서 하나가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깊숙한 곳의 박스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투박한 나무 상자. ‘1999학년도 졸업생 기록’이라고 삐뚤빼뚤 쓰인 펜 글씨가 보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서고에 울리는 듯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겨왔다. 그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낡은 앨범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손이 떨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숨통을 조여왔다. 첫 번째 앨범을 펼쳤다. 빛바랜 단체 사진 속에서 서연의 얼굴을 찾아 헤맸다. 보이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온 실망감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두 번째, 세 번째 앨범을 넘기던 지훈의 손이 네 번째 앨범에서 멈췄다. 표지에는 희미하게 ‘꿈꾸는 아이들’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평범한 졸업 앨범이 아닌, 학교에서 특별 활동으로 제작한 듯한 작은 수기집이었다. 기대 없이 펼친 페이지의 한구석, 작은 연필 스케치 옆에 쓰인 이름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서은.’
서은? 서연이 아니었다. 혼란이 밀려왔다. 그러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흑백 사진이 지훈의 심장을 송곳으로 꿰뚫었다. 앳된 얼굴,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옅게 드리워진 그늘. 분명 서연이었다. 자신이 알던 그녀보다 훨씬 어리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그 미묘한 눈매와 입술 선은 틀림없이 그의 서연이었다. 그런데 이름이 달랐다. 정서은. 이 이름은 도대체….
손끝으로 사진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사진 뒤에는 펜으로 희미하게 쓰인 날짜가 있었다. ‘1999년 7월 15일’. 그리고 그 아래, 알아보기 힘든 작은 글씨로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이젠… 괜찮을까?’
지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서연은 왜 다른 이름으로 이 학교에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어린 시절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삶이 있었단 말인가? 어쩌면, 이 학교 기록보관소에 그녀가 숨기고 싶어 했던 과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찾아 헤맨 수많은 밤들, 모든 단서들이 결국 새로운 미궁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아온 길이, 이제는 잃어버린 그녀의 과거를 찾아야 하는 길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젠 괜찮을까? 그 문장의 의미는 무엇일까.
창밖으로 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낡은 서고의 먼지를 반짝이게 했다. 지훈은 사진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눈앞의 사진 속 서연은 여전히 해맑았지만, 그 눈빛 어딘가에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이 작은 사진 한 장이 지난 수년의 수색만큼이나 거대한 비밀의 문을 열어젖혔음을. 이제 그는 단순한 탐정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잃어버린 과거를 추적해야 하는, 더욱 깊고 고통스러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지훈은 주머니 속에서 낡은 수첩을 꺼냈다. ‘정서은’. 새로운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결코 포기하지 않을 그의 굳은 다짐을 함께 새겼다. 이 밤은 길어질 것이다. 그녀의 진짜 과거를 찾아내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