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의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은 빛바랜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그의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흐릿한 인화지 속, 해맑게 웃는 은서의 얼굴은 그가 1062번의 밤낮을 헤매며 찾아 헤맨 유일한 이정표였다. 낡은 고물상의 노인이 건넨 단 하나의 단서, ‘그녀의 그림은 이곳 오래된 화실 골목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억 조각이 강준을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곳, 시간이 멈춘 듯한 골목으로 이끌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얇은 코트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강준은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허물어져 가는 벽돌 건물들 사이, 덧칠된 페인트 자국으로 겨우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낡은 간판에 고정되었다. ‘푸른 언덕 화실’. 간판의 글자들은 희미했지만, 강준의 가슴속에서는 선명한 종소리처럼 울렸다. 은서가 한때 꿈을 키웠던 곳. 그가 은서와 헤어진 후 처음으로 찾아낸, 그녀의 손길이 닿았을 가장 확실한 흔적이었다.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밀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부는 온통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고, 캔버스를 얹었을 이젤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창문은 깨져 있었고, 그 틈으로 스며든 빛줄기는 허공에 떠다니는 먼지들을 드라마틱하게 비추고 있었다. 강준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화실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의 눈은 은서의 흔적, 단 하나의 조각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하게 번뜩였다.
“은서야… 네가 여기 있었어?”
강준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낡은 나무 바닥, 벽에 걸려 있던 덧댄 자국, 심지어 닳아버린 의자의 흔적까지 훑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던 낡은 캔버스 더미에 닿았다. 먼지를 털어내자, 가장 위에 놓인 캔버스에서 희미한 스케치 하나가 드러났다. 아직 미완성인 그림은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풍경이었다. 섬세한 선과 독특한 명암 표현. 강준은 그림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은서의 그림이었다. 그는 수많은 그림을 봐왔지만, 은서의 붓질은 언제나 특별했다. 그림 속 도시는 어딘가 쓸쓸하고 고독했지만, 그 안에는 희미한 희망의 빛이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은서의 삶, 그리고 강준이 그녀를 찾아 헤매는 여정 같았다. 강준은 그림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캔버스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은서를 만났던 날로부터 겨우 몇 주 후의 날짜였다.
그림을 들고 서 있는 강준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녀의 향기, 그녀의 숨결이 그림 속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하고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무엇이 그녀를 이 화실에서 떠나게 했을까. 강준은 그림을 품에 안고 벽을 더듬었다. 벽 한쪽 구석, 닳아버린 석고 위에 손가락으로 파인 듯한 작은 이니셜이 보였다. ‘E.S.’ 그리고 그 옆에는 강준만이 알 수 있는, 그들만의 암호처럼 새겨진 작은 별 모양이 있었다. 그의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한 번 더 훅 끼쳐 들어왔고, 그 바람과 함께 낯선 그림자가 강준의 시야에 들어섰다. 강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은 중년의 여인이었다. 짙은 코트를 입고 스카프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강준만큼이나 날카롭고 불안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가죽 가방이 들려 있었고, 그 시선은 강준이 들고 있는 은서의 그림에 정확히 꽂혔다.
“당신은… 누군가요?” 여인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거기 있는 그 그림… 그건 당신 것이 아닙니다.”
강준은 그림을 더욱 단단히 품에 안았다. 그는 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자신과 같은 간절함이, 혹은 다른 종류의 절박함이 그녀의 눈빛 속에 서려 있는 듯했다. 수많은 헛수고와 실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았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그림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왜 그녀는 은서의 그림을 알고 있으며, 왜 지금 이 순간 이곳에 나타난 걸까? 강준의 탐정 본능이 위험 신호를 보냈다.
“이 그림의 주인은 제가 찾는 사람입니다,” 강준이 침착하게 말했다. “혹시… 은서 씨를 아시는 분이십니까?”
여인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쳤다. 놀라움, 경계, 그리고… 슬픔? 그녀는 스카프를 살짝 내렸고, 그 아래로 드러난 입술이 작게 떨렸다. 그녀의 눈빛은 강준을 꿰뚫어 볼 듯 강렬했다. 마치 오래된 비밀이 담긴 상자의 뚜껑이 열리는 순간처럼, 화실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신이 은서를 찾고 있는… 그 사람인가요?” 여인은 되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이제 날카로움 대신 묘한 회한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곳에 없어요.”
강준의 심장이 쿵 하고 다시 한번 내려앉았다. 이 여인은 은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은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강준은 숨을 들이켰다. 1063번째의 물음표가 그의 앞에 놓였다. 이 여인은 과연 그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좌절의 그림자를 드리울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