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향기, 오늘을 묻다
강준은 낡은 필름 사진 한 장을 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흑백 사진 속의 서연은 앳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가 즐겨 찾던 오래된 책방 입구에서 찍힌 사진.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책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주변에 새로 생긴 낡은 건물들을 수소문한 끝에, 강준은 마침내 한 모퉁이에 자리한 작은 갤러리 겸 서점 ‘추억의 페이지’를 찾아냈다. 간판은 손때 묻은 나무로 되어 있었고, 삐걱거리는 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희미한 커피 향이 그를 감쌌다.
“실례합니다.”
점점 더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는 이 발걸음이 무언가에 닿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갤러리 안은 고요했다. 벽에는 낯선 화가들의 풍경화와 인물화가 걸려 있었고, 한쪽 벽면에는 낡았지만 잘 정돈된 책들이 가득했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장 안쪽 코너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수채화 도구들과 함께 아직 마르지 않은 그림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림 속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득했다. 단순하지만 섬세하고,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품고 있는 꽃들. 바로 서연이 즐겨 그리던 방식이었다. 그녀는 늘 거창한 풍경보다는 작은 들꽃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했었다. 강준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익숙한 붓 터치, 색감. 착각일 리 없었다. 이 그림은, 서연의 것이었다.
“손님, 혹시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강준은 놀라 돌아섰다. 예순쯤 되어 보이는 여인이 단정한 앞치마를 두른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온화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미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저, 저기…” 강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그림으로 향했다. “이 그림… 누가 그리신 건가요?”
여인의 시선도 그림으로 향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오랜만에 보시는군요. 이 그림은 저의 친구가 그린 겁니다. 이 공간의 주인 같은 친구죠.”
강준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친구. 공간의 주인. 그는 주머니 속 사진을 꺼내 여인에게 내밀었다.
“혹시… 이 사진 속 여인을 아시나요? 이름은 서연입니다.”
여인의 시선이 사진 속 서연에게 머물렀다. 잠시 그녀의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슬픔,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체념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서연이… 찾으시는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강준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늦었다니? 그는 무엇이 늦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년을 찾아 헤맨 이 길이, 이 순간이, 결국 늦었다는 말로 끝나버리는 것인가? 그의 손에 든 사진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무슨 말씀이신가요? 서연이가… 서연이가 어디 있습니까?”
여인은 그림 쪽으로 걸어가 그림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강준을 향해 돌아섰다.
“서연이는… 이제 여기에 없습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오랜 비밀을 지켜온 사람처럼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림과 함께 사라졌으니까요.”
강준은 말을 잃었다. 사라졌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절망의 끝을 의미하는가. 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수십 년의 시간이, 이 한 문장으로 다시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어디로요? 어디로 사라졌다는 겁니까!” 강준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여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늘… 새로운 세상을 꿈꿨어요.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향해 떠났죠.” 그녀의 시선이 멀리 창밖을 향했다. “강준 씨가 찾던 서연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말은 마치 차가운 비수처럼 강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존재하는 않을지도 모른다니. 그 모든 세월의 노력이, 희망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듯한 절망감에 강준은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과연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왜, 그토록 그에게서 자신을 감춘 것일까? 이 미완의 이야기는 이제 또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