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안개가 마을을 덮었다 걷히는 시간, 김덕수 이장님의 하루는 늘 그랬듯이 우렁찬 기지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삐거덕거리는 마루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그의 발걸음은 생기 넘치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듯했다. 따스한 아랫목을 뒤로하고 부엌으로 향하는 길,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간밤의 꿈자리를 털어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한 된장찌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은 오늘 아침, 이장님 댁의 평화로운 의식이었다.
“오늘도 별 탈 없이 무사히, 그리고 행복하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밥숟갈을 뜨는 이장님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매일 똑같은 듯해도 매일 새로운 것이 시골 마을의 하루였다. 굽이굽이 이어진 마을 길처럼 그의 하루 역시 예측할 수 없는 사연들로 가득 차곤 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선 이장님은 서늘한 새벽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멀리 산등성이에는 아직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보랏빛 구름이 걸려 있었다. 문득, 얼마 전 마을 어르신들이 모여앉아 걱정스럽게 이야기했던 묵은지 김장 이야기가 떠올랐다. 올해 배추 농사가 영 신통치 않아 김장거리가 부족할까 봐 걱정하는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이장님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 회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뛰어야 마음이 편했다.
마을 회관으로 가는 길, 길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들이 이장님의 키를 훌쩍 넘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여름내 뜨거운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며 자란 해바라기들은 이제 그 빛깔마저 깊어져 가을의 문턱에 서 있음을 알렸다. 이장님은 해바라기 한 송이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노랗게 물든 꽃잎 사이로 보이는 까만 씨앗들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마치 마을 사람들의 한 해 수고가 이 씨앗 속에 고스란히 담긴 것만 같아 마음이 뭉클했다.
회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은 먼지 냄새와 함께 지난밤의 정적(靜寂)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장님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길어 걸레를 빨았다. 뽀득뽀득 닦이는 마루와 서서히 밝아지는 회관 안 풍경은 마치 마을의 고단했던 어제를 씻어내고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물걸레질을 마칠 즈음, 회관 마당으로 누군가 조심스럽게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최 할머니였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고 있지만, 늘 고운 미소를 잃지 않는 마을의 큰 어르신이었다.
“이장님, 아침부터 부지런하시네요. 웬일이셔?”
최 할머니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포근한 옛이야기 같았다. 이장님은 환한 웃음으로 할머니를 맞았다.
“할머니, 일찍 나오셨네요? 김장 배추 밭에 가보시게요?”
최 할머니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어제부터 밤새도록 뒤척거렸어. 우리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 말이야. 올봄에 꽃은 이쁘게 피더니만, 여태 감이 영 시원찮아. 옆집 순덕이네 감나무는 벌써 주렁주렁 열렸는데, 우리 감나무는 영 힘이 없어 보여. 병이 들었나 싶기도 하고….”
이장님의 얼굴에 순간 걱정스러운 빛이 스쳤다. 최 할머니의 감나무는 할머니가 시집올 때부터 함께했던, 그야말로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한 나무였다. 할머니에게 그 감나무는 단순한 나무가 아니라 가족이자 세월의 증인이었다. 감나무에서 감이 잘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할머니에게는 그 어떤 큰 걱정보다도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아, 감나무 말씀이세요? 걱정 마세요, 할머니. 제가 오늘 가서 자세히 한번 볼게요. 제가 나무는 잘 몰라도, 이장이라면 뭐든 해결해드려야죠!”
이장님은 활짝 웃으며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투박하고 주름진 손이었지만,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따스했다. 할머니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듯 가늘게 웃었다. “그래, 이장님이라면 믿음직하지. 고마워.”
최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침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이장님은 최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곧장 할머니 댁 마당으로 향했다. 할머니 댁 감나무는 마당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별문제 없어 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잎사귀들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감꽃이 피었던 자리에 맺힌 어린 감들은 예상보다 훨씬 적었다.
이장님은 나무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땅을 파보기도 하고, 잎사귀를 하나하나 들여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무에 대해 문외한인 그로서는 정확한 원인을 알 길이 없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아랫마을 박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씨는 대대로 과수원을 해온 터라 나무에 대해서는 도사나 다름없었다.
“박 씨! 나 이장인데, 최 할머니 댁 감나무가 좀 시원찮아서 말이야. 바쁘겠지만 혹시 잠시 들러서 좀 봐줄 수 있나?”
“이장님, 최 할머니 댁 감나무요? 알겠습니다. 제가 지금 바로 갈게요.”
박 씨는 흔쾌히 응해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트럭을 몰고 최 할머니 댁 마당으로 들어섰다. 박 씨는 보자마자 능숙한 솜씨로 감나무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나무 기둥을 두드려보고, 잎사귀를 훑어보고, 땅의 상태를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장님, 별거 아니네요. 아마 올해 날씨가 유난히 변덕스러워서 영양분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며칠 전부터 제가 과수원에 쓰려고 들여놓은 영양제 있는데, 그거 좀 주면 금방 살아날 겁니다. 그리고 가지치기도 조금 해주면 좋겠네요.”
박 씨의 말에 이장님과 최 할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박 씨는 트럭에서 영양제 한 포대를 꺼내와 이장님과 함께 감나무 뿌리 근처에 정성껏 뿌려주었다. 이장님은 낫을 빌려와 박 씨가 일러주는 대로 마른 가지들을 잘라냈다. 그들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감나무는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 듯했다. 최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박 씨. 이장님도 참 고맙구려.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최 할머니의 따스한 미소와 박 씨의 넉넉한 마음 덕분에 감나무는 다시 희망을 얻었다. 이장님은 감나무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픔이라도,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해결하려 노력한다면 어떤 문제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작은 마을의 감나무 한 그루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의 정성과 염려가 깃들어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공동체의 소중함을 느꼈다.
오후가 되자 이장님은 마을 회관으로 돌아와 지난밤 처리하지 못했던 서류들을 정리했다. 오후 내내 분주했지만, 그의 마음은 아침보다 훨씬 가벼웠다. 문득 창밖을 보니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마을 어귀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었다. 해 질 녘 노을빛이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에 내려앉아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마을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으며 이장님은 잠시 펜을 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 최 할머니의 감나무처럼 마을에도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이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장님은 믿었다. 이 마을의 모든 아픔과 걱정들은 결코 혼자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나누고, 함께 위로하며, 함께 해결해 나갈 때 비로소 마을은 더욱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노을빛이 더욱 짙어지며 하루의 끝을 알리는 순간, 이장님의 얼굴에는 피곤함보다는 깊은 만족감과 내일을 향한 유쾌한 설렘이 가득했다. 그의 하루는 언제나 그랬듯이, 따뜻한 마음과 소박한 행복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