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오래된 돔의 깨진 창문 사이로 휘몰아쳤다. 수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낡은 망원경의 거대한 잔해가 한때 별들을 향했던 그 웅장함을 잃은 채, 먼지와 녹으로 뒤덮여 있었다. 카인은 굳은 입술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곳은 그가 어렴풋한 환영 속에서 수없이 보아왔던 장소였다. 산 정상에 버려진 옛 천문대. 도시의 불빛이 아득히 멀리 점멸하는 이 고립된 공간에서, 그는 이유 모를 이끌림에 홀린 듯 지난 몇 주를 보냈다.
그의 손가락이 낡은 금속 난간을 스쳤다. 얼음장 같은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기억을 잃어버린 지 얼마나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시간을 넘어 방황하는 자신을 ‘시간 여행자’라고 부르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다는 것만이 그의 실존을 증명하는 전부였다. 그는 가끔씩 꿈을 꾸었다.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무수한 시대의 풍경들, 그리고 한없이 슬픈 눈을 가진 여인의 얼굴. 그 여인이 누구인지, 자신과 어떤 관계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카인의 시선이 망원경 잔해 아래, 덮개도 없이 노출된 복잡한 제어 패널로 향했다. 한때 빛을 발했을 수많은 버튼들은 이제 색이 바래고 글자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하나의 버튼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다른 것들과 달리 매끄럽게 마모되어 있었고, 그 위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이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낡은 나침반의 바늘 같은 형상 주위로, 세 개의 원이 겹쳐진 문양.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버튼에 닿는 순간, 정전기라도 통한 듯 미세한 전류가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망각의 장막 뒤에 갇혀 있던 한 조각의 기억이 벼락처럼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기억의 파편: 별빛 아래의 약속
차가운 기계음, 반짝이는 제어판, 그리고… 그녀의 얼굴. 놀랍도록 선명했다. 긴 흑발은 어깨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별빛을 담은 듯한 깊은 눈동자는 걱정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천문대, 그러나 훨씬 더 깨끗하고 활기찬 모습의 천문대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인, 정말 이걸 해야만 해요?”
그녀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렸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함이 섞인 음성. 카인은 그 이름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제야 그의 진짜 이름이 떠오른 것이다. 카인.
그는 제어판을 내려다보았다. 바로 지금 자신이 손대고 있는 그 버튼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 버튼 주변에 새겨진 문양은, 그녀의 목에 걸린 은빛 펜던트와 똑같았다. 펜던트는 그녀의 심장 근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응, 유나. 이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야. 인류가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
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침착했지만, 그 속에는 폭풍 같은 결의와 함께 숨겨진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기억 속의 그는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내가 시간을 되돌릴 거야. 이 모든 비극을 막을 거야. 그리고…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게.”
유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기억은요? 당신이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기억 속의 카인은 미소를 지었다. 슬픔이 가득한, 그러나 다정한 미소였다. “내 기억은 사라질지도 몰라. 하지만 우리 약속은 사라지지 않아. 이 문양이 새겨진 것을 찾으면…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내가 무엇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지 알게 될 거야.”
그는 그녀의 목에 걸린 펜던트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을 제어판 위의 그 버튼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음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기다릴게요, 카인.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계속… 당신을 기다릴게요.”
버튼이 눌러지는 순간, 온몸을 찢는 듯한 섬광과 함께 기억은 산산조각이 났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되살아난 감정
카인은 숨을 헐떡이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손은 여전히 낡은 제어판의 그 버튼 위에 놓여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슴 속에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그를 집어삼켰다. 그는 유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러나 그 이름과 그 얼굴이 주는 감정의 무게는, 그의 모든 존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유나… 그는 그녀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잊혀진 기억 속의 사랑. 잃어버린 임무. 그는 왜 시간을 되돌렸을까? 어떤 비극을 막으려 했던 걸까? 그 질문들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동시에,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만약 그가 기억을 잃었다면, 그가 성공적으로 시간을 되돌리긴 했을까? 아니면… 실패한 것일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제어판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데이터 패드였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그 패드 위에는 기억 속의 그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패드를 들어 올렸다. 고물처럼 보였지만, 그의 손에 닿자마자 패드의 화면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삐-익. 낮은 전자음과 함께 화면에 글자들이 나타났다. 오래된 언어, 그러나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글자들이었다.
데이터 복구 중…
프로젝트명: 아스포델
목표: 세계선 재조정
결과: 불명
오류: 기억 손실 감지, 임무 재개 필요
최종 메시지: 유나로부터
카인의 손이 떨렸다. 유나로부터. 그녀가 그에게 남긴 메시지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다급하게 화면을 터치했다. 새로운 메시지가 스크롤되어 나타났다.
“카인. 이 메시지를 보고 있다면, 당신은 여전히 저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겠죠. 하지만 괜찮아요. 당신은 항상 방법을 찾았으니까. 당신이 떠난 후, 이 세계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어요. 당신의 시도가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 미쳤다는 증거겠죠. 하지만 완벽하지 않아요. 아직 비극은 끝나지 않았어요. 나는 당신이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이 모든 것을 기록했어요. 당신의 모든 발자취를 추적하고, 새로운 위험들을 발견했어요. 이제 당신의 다음 목적지는 ‘흐린 호수’의 심장부에 잠들어 있는 ‘시간의 눈물’입니다. 그것만이 당신의 모든 기억을 되찾고, 이 모든 것을 바로잡을 열쇠가 될 거예요. 서둘러요. 시간이 없어요. 그들이 당신을 찾고 있어요.”
메시지의 마지막 문장이 스크롤되는 순간, 패드의 화면이 갑자기 깜박이더니 검게 변했다. 동시에 천문대 외부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쿵, 쿵.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가 산을 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인은 패드를 꽉 쥐었다. 유나. 흐린 호수. 시간의 눈물. 그들이 그를 찾고 있다는 경고까지. 잃어버린 과거가 한 조각의 기억과 하나의 메시지로 다시 그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그는 더 이상 목적 없는 방랑자가 아니었다. 그는 임무를 가진 자였다. 잊어버린 사랑을 다시 만나고, 잃어버린 세계를 구해야 할 운명을 짊어진 시간 여행자였다.
천문대 문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을 타고, 낯선 기계음과 함께 섬뜩한 그림자들이 문틈으로 비쳐 들어왔다. 그들은, 유나가 경고했던 ‘그들’이었다.
카인은 제어판에서 몸을 돌려 천문대 입구를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낡은 데이터 패드가 단단히 쥐어져 있었다. 잊혀진 약속의 무게가, 그리고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절박한 메시지가 그의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그는 유나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시간의 눈물’을 찾아, 모든 것을 바로잡아야 했다. 멈출 시간은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