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070화

오랜 기다림의 볕살

마을 뒤편 대숲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은 이제 더 이상 겨울의 매서운 칼날을 품고 있지 않았다. 갓 깨어난 새싹들의 연둣빛 숨결과, 얼었던 흙 내음 사이로 피어나는 달콤한 기운을 실어 나르는 바람이었다. 순옥 할머니는 삐걱이는 툇마루에 앉아, 햇살 아래 졸고 있는 늙은 고양이 ‘점박이’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어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아직도 어딘가 아련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봄이 왔구나, 점박아.”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덧없이 흘러간 시간과 다가올 미지에 대한 묘한 기대감이 뒤섞여 있었다. 올해로 여든여덟. 그녀는 이곳, 강줄기가 굽이치는 작은 마을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 긴 세월의 대부분을, 단 하나의 약속, 단 하나의 소식을 기다리며 살았다.

사십 년 전, 갓 스물을 넘긴 아들 민규는 도화꽃 피는 봄날, 푸른 버드나무 아래서 약속했다. “어머니, 제가 세상에 나가 큰 사람이 되어, 이 봄바람이 전하는 가장 좋은 소식을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바람이 제 대신 어머니를 보살필 겁니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고, 목소리에는 젊음의 패기가 가득했다. 순옥 할머니는 그때, 아들의 말에 숨겨진 깊은 외로움과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지만,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 아들은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의 속삭임

매년 봄이 올 때마다, 할머니는 아들의 약속을 떠올렸다. 봄바람은 수없이 많은 이야기를 실어 날랐다. 때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장터의 활기찬 소리를, 때로는 밭에서 일하는 이웃의 흥얼거림을, 때로는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를 전해주었다. 하지만 그 어떤 바람도, 할머니가 애타게 기다리던 ‘가장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오늘은 달랐다. 아침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여느 봄바람과는 다른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갓 돋아난 풀냄새와 아직 덜 여문 산나물의 아린 향기 사이로, 뭔가 익숙하면서도 잊혀진 듯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서책 속에서 느껴지던 묵향 같기도 했고, 이른 새벽 아궁이에 피워 올리던 솔잎 향 같기도 했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뭉클한 감정이 치솟았다.

“설마…”
할머니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들의 체취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들이 떠나기 전 늘 쓰던 베갯속에서 나던, 오래된 인삼 뿌리와 말린 대추 향이 희미하게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냄새는 아들이 떠나기 전, 잠 못 이루는 그녀의 밤을 달래주었던 유일한 위안이었다.

점박이가 고개를 들고 할머니의 손등을 핥았다. 녀석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한 듯했다. 할머니는 흐릿해진 눈으로 대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푸르게 피어나는 새싹들과 바람에 일렁이는 대나무 잎사귀들뿐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알 수 있었다. 오늘 불어오는 바람은 여느 봄바람이 아니라는 것을.

낯선 울림, 익숙한 가락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할머니는 식은 밥 한 덩이를 겨우 넘겼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이웃집 김 씨 부인이 문안을 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할머니의 마음은 온통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바람은 계속 불어왔고, 그 바람은 점점 더 뚜렷한 메시지를 전하는 듯했다.

오후 늦게, 마을 어귀에서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깔깔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였다. 바람이 잠시 잦아들었다가 다시 휘몰아치며, 아주 희미하지만 명확한 소리 하나를 실어 왔다. 그것은 분명 퉁소 소리였다. 구슬프면서도 어딘가 굳건한, 한 시절의 그리움을 담은 듯한 퉁소 가락.

할머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민규가 어린 시절, 외갓집에서 얻어온 낡은 대나무 퉁소로 밤마다 불던 가락이었다. 당시에는 ‘퉁소 실력이 형편없다’며 구박했지만, 그 소리만큼은 할머니의 귓가에 평생 각인되어 있었다. 아들만이 낼 수 있었던, 조금은 어설프지만 진심이 담긴 그 음색.

“민규야…”
할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주름진 손으로 방문을 부여잡았다. 바람은 퉁소 소리를 잠시 멀리 데려갔다가, 다시 한 번 뚜렷하게 실어왔다.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 더욱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마치 마을 어귀를 돌아, 바로 이 집을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절벽 끝에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고독하면서도 강인했다. 오랜 세월을 견딘 나무뿌리처럼 굳건하면서도, 한때 푸르렀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할머니는 그 소리에서 민규의 젊은 날을 보았다. 세상의 풍파를 겪으며 단단해졌을 그의 모습, 그리고 여전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품고 있을 그의 마음을 느꼈다.

마지막 희망의 발걸음

할머니는 툇마루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리가 굽어 몸을 일으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퉁소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방향, 마을로 들어서는 큰 길 쪽으로 향했다. 점박이가 할머니의 뒤를 졸졸 따랐다.

마을 입구로 향하는 길은 멀게 느껴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봄바람이 실어 온 퉁소 가락 앞에서 활짝 열리는 듯했다. 이것이 아들의 약속이었을까? 가장 좋은 소식이라 함은, 결국 아들 자신이 돌아오는 것이었을까?

바람은 할머니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그 바람은 더 이상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오랜 기다림에 대한 응답이었고, 잊혀지지 않는 사랑의 증표였으며, 마침내 도달한 하나의 희망이었다. 퉁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할머니의 가슴속에 뭉클한 감동과 함께,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터뜨리게 했다.

순옥 할머니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은 채, 그저 퉁소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사십 년의 기다림 끝에,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한 가닥 퉁소 가락이었지만, 그것은 세상 그 어떤 편지보다도 명확하고, 어떤 말보다도 진실한 소식이었다. 이 소식이, 과연 어떤 재회를 불러올 것인가. 할머니의 굳건한 발걸음은 그 답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