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창문을 두드렸다. 설원은 온통 빛을 잃은 듯 희미했고, 창 너머로 보이는 키 큰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칼날 같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계절의 심장에 와 있는 듯한 고요하고도 냉혹한 풍경. 윤서는 난로의 미약한 불꽃이 드리운 작은 방에서, 낡은 목함 속에 고이 간직된 조약돌을 매만지고 있었다.
돌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지만, 표면에 새겨진 정교한 눈꽃 문양만큼은 희미하게 남아 빛나고 있었다. 그 섬세한 조각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돌멩이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지환과의, 잊을 수 없는 약속의 증표였다.
며칠 전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했다. ‘북방 설산 인근에서 지환 부대의 흔적 상실. 추정컨대 적에게 포위되었거나… 최악의 경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던 전령의 얼굴에 어린 절망은 윤서의 심장에 비수처럼 박혔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흔들리는 모든 것을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약속이 있었으니까.
가슴 시린 맹세
시간은 덧없이 흘렀고, 계절은 수십 번 바뀌었다. 하지만 어떤 순간도, 어떤 세월도 그날의 기억을 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북풍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날. 지환과 윤서는 아직 어렸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이미 세상의 무게를 아는 듯한 숙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윤서야, 봐. 눈꽃이 이렇게 예쁘지?”
지환은 빨개진 손으로 하얗게 쌓인 눈을 쓸어 모아 작은 눈덩이를 만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어른스러워 보이려 애쓰는 사내아이의 결연함이 공존했다. 그는 이내 품속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강가에서 주운 듯 매끄럽고 둥근 돌이었다.
“내가 이걸 너에게 줄게. 내가 직접 조각한 눈꽃이야. 어때, 진짜 눈꽃 같지?”
서툰 솜씨였지만, 작은 돌 위에 새겨진 눈꽃 문양은 소년의 진심을 담아 반짝였다. 윤서는 조심스럽게 돌을 받아 들었다.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뜨거웠다.
“지환아…”
소년은 윤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나이의 아이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장함이 담겨 있었다.
“세상이 아무리 차가워지고,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지게 되어도, 이 눈꽃이 내리는 날을 기억해 줘. 그리고 약속해 줘. 내가 어떤 고난을 겪고, 어떤 길을 헤매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거야. 이 눈꽃처럼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때까지… 너는 나를 기다려 줘. 그리고 내가 돌아올 길을 밝혀 줘.”
윤서의 눈가가 시큰거렸다. 어린 가슴속에 맹세는 돌이킬 수 없는 숙명처럼 각인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지만 단호한 움직임이었다.
“응, 지환아. 약속할게. 이 눈꽃이 내리는 날을 기억할게. 네가 돌아올 때까지, 이 눈꽃처럼 시들지 않는 마음으로 기다릴게. 그리고 네가 어디 있든, 내가 네게 닿을 수 있는 빛이 될게.”
그날, 하얀 눈송이가 춤추듯 쏟아져 내리던 세상 한가운데서,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잡고 영원과 같은 약속을 맺었다. 그 약속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미래를 엮는 단단한 실타래가 되었다.
다가오는 그림자
현재로 돌아온 윤서의 손에는 여전히 조약돌이 쥐여 있었다. 그날의 지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 선명했다. ‘내가 돌아올 길을 밝혀 줘.’ 그녀는 지금, 그 약속을 이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로에 서 있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은성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은성은 윤서의 오랜 조력자이자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윤서 님.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은성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지환 님의 부대가 적 ‘흑룡단’의 심장부에 갇혀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보다 더 깊은 곳입니다. 탈출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윤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거의 불가능. 그 말은 곧… 하지만 그녀는 다시 조약돌을 꽉 쥐었다. 안 돼. 그녀는 기다려야만 하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그가 돌아올 길을 밝혀야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방법은?” 윤서가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은성은 잠시 머뭇거렸다.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수년간 준비해 온 ‘새벽별 작전’을 지금 당장, 불완전한 상태로 발동해야 합니다. 성공 확률은 낮고, 발각될 경우 우리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전체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지환 님 한 분을 위해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를 수 있습니다.”
‘새벽별 작전’은 수년간 은밀히 구축해온, 적의 심장부를 교란시켜 내부로부터 붕괴시키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단 한 번의 기회로 끝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지환 한 사람을 위해 그것을 조기 발동해야 한다니. 수많은 동지들의 희생이, 오랜 염원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윤서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어둠이 아니었다. 하얀 눈밭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어린 지환의 얼굴. 그리고 그의 다짐이었다. ‘내가 돌아올 길을 밝혀 줘.’
선택은 명확했다. 기다림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그의 약속이 빛을 잃지 않도록 모든 것을 내던지는 용기였다. 약속은 그들의 생명줄이자, 윤서의 존재 이유였다.
“새벽별 작전을 발동하겠습니다.”
윤서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방안을 울렸다. 은성의 얼굴에 당혹감과 함께 깊은 존경심이 스쳤다. 그녀는 윤서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약속이 윤서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윤서 님. 너무나 큰 위험입니다. 성공한다 해도, 이후의 파장이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흔들림 없는 단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분명히, 하얀 눈꽃이 춤추던 그날의 약속을 향해 있었다.
“지환은 반드시 돌아올 거야. 그 약속은 깨지지 않을 거야. 나는 그가 돌아올 길을 밝혀야 해. 설령 그 길이 가시밭길이고, 나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게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일이야.”
창밖으로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게 흩날리던 눈송이들이 이내 거친 바람을 타고 휘몰아쳤다. 마치 윤서의 내면을 뒤흔드는 폭풍처럼, 세상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갔다. 새벽별 작전의 서막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과 함께, 가장 격렬한 눈보라 속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조약돌을 꽉 쥐고, 결연한 눈빛으로 문밖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