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은 밤이 깊도록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붙들고 있었다. 닳아 해진 종이 냄새는 이제 그녀에게 가장 익숙하고도 아련한 향이 되었다. 수많은 밤을 이 노트와 함께 보냈지만,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새로운 상처와 사랑, 그리고 눈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펼쳐든 페이지는 유독 잉크가 옅어지고 글씨체가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던 것처럼.
“1957년 늦가을,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던 날. 미처 피워보지 못한 꿈이 서리를 맞아 시들어가던 날이기도 했다. 언젠가 나도 저 겨울 들판처럼 텅 비게 될까. 붓을 놓는 순간, 세상의 모든 색깔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사라진 건 세상이 아니라 나의 세상이었지.”
지현은 숨을 들이켰다. 할머니는 한 번도 당신의 젊은 시절 꿈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세상이 어려웠다’, ‘살기 바빴다’는 말로 모든 과거를 뭉뚱그려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한 줄의 고백은 그 어떤 장황한 설명보다도 묵직하게 지현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머니의 병환은 깊어지고, 동생들의 학비는 막막했다. 내 손에 쥐어진 붓 대신, 난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느질을 시작했다. 한 땀, 한 땀. 실과 바늘 끝에 매달린 것은 나의 미래가 아니라 가족들의 내일이었다. 창밖으로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내 안에서는 뭔가 뜨거운 것이 녹아내렸다. 차라리 울음이었으면 좋으련만, 목구멍에 걸린 덩어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했다. 그저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지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늘 강하고, 지혜로우며, 불평 한마디 없이 모든 것을 이겨낸 할머니만을 알고 있었다. 전쟁의 아픔도, 가난의 고통도 묵묵히 견뎌낸 거인 같은 할머니. 하지만 일기장 속의 할머니는, 자신을 위해 울어줄 시간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여린 예술가였다. 그녀는 한때 붓을 쥐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으려 했던, 찬란한 꿈을 가졌던 소녀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다시 붓을 들지 못했다. 수십 년이 흘러 내 손은 굳은살 박인 투박한 손이 되었고, 세상의 모든 색깔은 그저 나에게 먹고사는 문제로만 보였다. 가끔 밤하늘의 별을 볼 때, 잊혀진 그림들이 떠오르곤 했다. 저 별빛처럼 반짝이던 나의 꿈들이. 그래도 후회는 없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었으니. 하지만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나의 삶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이 고단한 삶 말고, 조금은 더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었을까.”
‘후회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마지막 문장에 담긴 아련한 그리움과 체념은 지현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할머니는 한 번도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꿋꿋하게 살아내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듬어 안았다. 그런데 그 모든 강인함 뒤에는, 이토록 눈물겨운 희생과 묻어버린 꿈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지현은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흐느꼈다. 평생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할머니의 진짜 슬픔이, 오백하고도 스물다섯 번째 밤에 그녀에게 닿았다. 일기장 속의 잉크는 흐려졌지만, 그 고백은 지현의 가슴에 선명한 상처로 새겨졌다. 할머니의 몫까지, 그녀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깊은 고민과 함께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