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078화

김현우는 낡은 트렌치코트 깃을 바싹 여몄다. 해무가 자욱한 새벽, 어촌 마을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오래된 목재 건물의 눅눅한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 이름조차 생소한 ‘해랑포’까지 그를 이끈 것은 낡은 사진 한 장과 지워질 듯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1078번째 발걸음. 햇수로 헤아리면 수십 년, 그의 인생 대부분을 채운 지난한 여정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때 묻은 사진을 꺼냈다. 빛바랜 사진 속의 서연은 스무 살의 맑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진 한쪽 모서리에 찍힌, 이 마을 어귀의 작은 등대와 유사한 문양의 희미한 그림자. 그것이 그를 이곳까지 오게 한 유일한 실마리였다. 수많은 길을 헤매고, 수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수많은 절망과 희망을 오갔다. 이제 그는 미약하나마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좁은 골목길을 걸어 들어갔다.

새벽녘, 인적이 드문 골목을 따라 한참을 걷자, 낡고 허름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의 손맛 정식’. 그 옆에는 작게 ‘다과’라고 덧붙여져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과 짭조름한 생선구이 냄새가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오래된 나무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안에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테이블을 닦고 있었다.

“어서 와요, 총각. 이리 이른 시간에 찾아오는 손님은 오랜만이네.”

할머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현우를 맞았다. 주름진 얼굴 가득 세월의 흔적이 깃들어 있었지만, 눈빛은 깊고 따뜻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혹시 이 마을에 사셨던 분 중에, 이 사진 속의 여인을 아시는 분이 계실까 해서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수많은 실패와 허탕 속에서 무뎌질 법도 한 기대감이었지만, 매번 새롭게 피어나는 간절함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는 듯하다가, 이내 뭔가를 떠올리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이런 아가씨를 모르면 내가 이 동네서 장사를 한 게 아니지. ‘별이’라고 불렀는데… 얼마나 착하고 예뻤던지.”

‘별이’… 서연의 별명 중 하나였다. 현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굳게 닫혔던 오랜 기억의 문이 조금씩 열리는 듯했다.

“할머니, 혹시 그 아가씨가 언제쯤… 이곳에 계셨는지 기억하시나요?”

“그럼 기억나고 말고. 딱 이맘때였어. 아주 오래전, 이 마을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잠깐 머물렀다 갔지. 혼자였는데도 어찌나 씩씩하던지. 밤마다 저 바닷가에 나가 앉아서 별을 보곤 했어. 그래서 내가 ‘별이’라고 부른 거지. 가끔은 작은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또 적었지. 그때마다 얼굴에 고독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곤 했는데…”

할머니의 이야기는 현우가 알던 서연의 모습과 너무나도 일치했다. 씩씩했지만, 내면에 깊은 그림자를 숨기고 있던 서연. 밤하늘의 별을 유독 좋아했던 서연. 그리고 늘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글을 쓰던 서연.

“그 아가씨,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는지요?” 현우의 목소리는 떨렸다.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가장 선명한 단서였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내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낡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들과 오래된 사진 몇 장, 그리고 작고 투박하게 짜인 목도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게… 서연이 아가씨가 두고 간 거야. 급하게 떠나면서 내게 맡겼어. 혹시라도… 혹시라도 자기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전해달라고 하면서. 이걸 건네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세월이 흘러 총각이 찾아올 줄이야.”

현우는 덜컥 상자 안의 목도리를 집어 들었다. 거칠지만 따뜻한 실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짜인 목도리였다. 오래전, 현우가 서연에게 선물했던 실뭉치로 직접 짜주겠다던 약속이 떠올랐다. 이 목도리가 바로 그때 그 약속의 흔적인가. 코끝이 시큰거렸다. 목도리에서 희미하게 서연의 체취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 아가씨… 갈 곳이 있다고만 했어. 저기 너머, 뭍으로 나가면 ‘청솔’이라는 이름의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했지.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고.”

청솔 도서관. 현우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새로운 지명, 새로운 단서였다. 해랑포는 서연의 긴 여정 중 한 페이지였을 뿐, 그녀의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서연은 그를 위해 이 목도리를 남겨 두었다. 그를 기다렸고, 희망을 심어두었다.

현우는 조용히 목도리를 가슴에 품었다. 오래도록 차갑게 굳어 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수많은 날들이 서연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고통이 단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할머니에게 연신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고, 그는 가게를 나섰다.

밖은 여전히 해무가 자욱했지만, 현우의 눈에는 한 줄기 빛이 선명하게 보였다. 청솔 도서관. 이름마저 푸르고 단단한 그곳으로 향하는 길. 현우는 낡은 트렌치코트 깃을 다시 한번 여미고, 주머니에 꽉 쥔 목도리의 온기에 의지하며 새로운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과거를 헤매는 것이 아니었다. 미래를 향해, 서연이 기다리는 그곳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