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동네 이장님의 하루 – 제345화

새벽녘, 고요하던 서리골 마을에 처음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언제나 이장님이었다. 삐걱이는 나무 마루를 밟고 사랑채를 나선 그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밤의 한기를 깊게 들이쉬었다.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와 풀 내음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웠다. 얇은 저고리 위로 덧입은 누비 조끼가 어쩐지 쌀쌀맞게 느껴졌지만, 이장님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이미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이고, 오늘 하루도 잘 부탁혀, 서리골.”

매일 아침 같은 인사를 건네며 마을 어귀의 당산나무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수백 년 세월을 견딘 굵은 나무 기둥은 묵묵히 서리골의 아침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장님은 습관처럼 나무 아래 돌멩이 하나를 주워 던져 삐딱하게 기울어진 이정표를 바로 세웠다. 그의 손길이 닿자 이정표는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와 달리 그의 발걸음에 아주 미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어제저녁, 김 할머니 댁에 들렀을 때 들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마을 공동 우물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영 시원찮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노인분들이 느끼는 사소한 불편함이려니 했지만, 몇몇 집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는 소문이 그의 귀에 들어왔다.

이장님은 공동 우물로 향했다. 새벽 안개가 걷히지 않은 우물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펌프질을 시작했다. 끄윽, 끄윽. 묵직한 소리를 내며 몇 번을 움직이자 투박한 철제 주둥이에서 물이 솟아 나왔다. 그러나 그 물줄기는 힘이 없었다. 마치 지친 노인의 한숨처럼, 간신히 꺾여 나오는 물줄기는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을 충분히 휘젓지도 못했다.

“허허, 이거 영… 아니다 싶네.”

이장님은 턱을 쓰다듬었다. 이 우물은 서리골 사람들의 생명줄과 같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던 넉넉한 우물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이장님을 거쳐 간 수많은 마을의 변화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온 서리골의 상징이었다. 이런 우물이 힘을 잃었다는 건, 그에게 단순한 불편을 넘어선 어떤 의미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펌프의 압력 문제일까, 아니면 지하수 수량이 줄어든 것일까. 혹 지하로 이어지는 파이프 어딘가가 막혔거나 손상된 것일 수도 있었다. 서리골의 공동 우물은 단순히 펌프 하나가 아니라, 마을 곳곳의 작은 수도꼭지로 연결되어 있어 밭일을 하는 주민들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날이 밝아오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물가로 나왔다. 여느 때처럼 아침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은 우물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너나 할 것 없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김 할머니는 허리를 짚고 나와 물줄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이장님. 내 그럴 줄 알았어야. 어째 요 며칠 물맛도 영 개운찮은 것이… 이러다 물 못 쓰는 건 아닐랑가 몰라.”

할머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의 불안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장님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할머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할머니, 염려 마시랑께요. 이 이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서리골 우물이 말라버릴 리가 있겠어요? 제가 당장 나서서 해결할 테니, 할머니는 시원한 물로 아침 식사 잘 하실 생각만 하셔요!”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얼굴에 깃들었던 그늘이 조금씩 걷히는 듯했다. 이장님은 서둘러 청년회장인 상규와 마을 유지들을 불렀다. 상규는 힘 좋고 일머리 빠른 서리골의 젊은 피였다. 이장님은 그에게 우물 아래쪽, 즉 물이 지하에서 올라오는 파이프 라인을 점검해볼 것을 부탁했다.

“상규야, 혹시 우물 본연의 힘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이송 과정에 문제가 생긴 건지 확인을 좀 해봐야 쓰겄다. 저 아래 밭으로 이어지는 주 파이프 관을 따라가 보면 분명 뭔가 실마리가 있을 게다.”

“네, 이장님! 바로 사람들 모아서 내려가 보겠습니다!”

상규는 든든하게 대답하며 몇몇 젊은이들을 데리고 우물 아래쪽 밭으로 향했다. 이장님은 홀로 우물가에 남아 펌프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겉보기엔 멀쩡했다. 녹슨 부분도 심하지 않았고, 손잡이도 부드럽게 움직였다. 문제는 펌프 자체가 아니라, 그 뿌리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밭에서 상규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이장님! 이장님! 여기 좀 와보세요!”

이장님은 후다닥 밭으로 뛰어갔다. 밭 한가운데, 오래된 나무뿌리가 뒤얽힌 곳에서 상규와 청년들이 삽을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흙더미 속에 묻혀 있던 낡은 주철 파이프가 지상으로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 파이프의 이음매 부분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주변 흙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물이 새면서 파이프 주변이 침하된 흔적도 보였다.

“아이고, 이런! 이게 언제부터 이랬댜?”

이장님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파이프의 이음매 부분이 부식되어 벌어진 틈으로 물이 새고 있었던 것이다. 물이 새면서 압력이 약해지고, 우물에서 나오는 물의 양도 줄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파이프는 마을 초창기부터 사용되어 온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어쩌면 수십 년간 흙 속에 묻혀 묵묵히 제 역할을 해왔을 터였다.

“이장님, 이거 파이프를 갈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이대로는 계속 물이 샐 겁니다.” 상규가 말했다.

“그려, 갈아야지. 근데 이걸 오늘 당장 갈 수 있을랑가…” 이장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이프를 교체하는 일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장비도 필요하고, 전문 인력도 불러야 했다. 무엇보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물이 원활하게 나와야 했다.

그때, 이장님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쳤다. 그는 씨익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밭일을 하러 나왔던 몇몇 어르신들과 젊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여러분!” 이장님이 크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유쾌함과 함께 묘한 설득력이 담겨 있었다. “서리골 우물이 병이 들었습니다! 이대로 두면 우리 마을 모두가 목마를 지경이니, 오늘 한마음 한뜻으로 팔 걷어붙이고 우물을 고쳐냅시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어떤 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어떤 이는 이장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 보였다. 그때 김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말했다.

“이장님, 우리가 뭘 어쩌게? 이 늙은이들이 힘을 쓸 일도 없고… 전문가는 불러야 하는 거 아니여?”

“할머니, 걱정 마세요! 우리가 못 할 일 뭐 있습니까? 일단 이 낡은 파이프를 파내는 일은 힘 좋은 상규네 청년들이 할 것이고, 새 파이프를 구해 오는 건 제가 읍내에 가서 당장 구해오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우리 어르신들은 저 파이프 주변에 있는 돌멩이들이랑 잔가지들 좀 치워주시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다 같이 힘을 합하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이장님의 열정적인 설명에 사람들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그래, 서리골 사람들은 원래 이랬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너나 할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던 것이다. 그의 말에 용기를 얻은 젊은이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파이프 주변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이장님의 말대로 주변의 돌멩이와 나뭇가지를 치웠다.

이장님은 낡은 경운기를 타고 읍내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경운기 위에서 그는 서리골의 역사를 떠올렸다. 예전에 다리가 끊어졌을 때도, 마을 회관 지붕이 무너졌을 때도, 사람들은 이렇듯 함께 힘을 모았다. 그는 이장으로서 늘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그의 역할은 단순히 행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희망을 북돋우는 일이라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너그럽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읍내 철물점에서 적당한 길이의 PVC 파이프와 연결 부속들을 구한 이장님은 서둘러 마을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왔을 때, 마을 밭은 이미 작업 현장으로 변해 있었다. 상규를 비롯한 청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낡은 파이프를 거의 다 파낸 상태였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몇몇 할머니들은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와 마루에 앉아 쉬는 청년들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아이고, 이장님 오셨어요! 이거 보십시오! 싹 다 파냈습니다!” 상규가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오냐, 상규야, 고생 많았다! 자, 그럼 이제 이 새것으로 갈아 끼워보자꾸나!”

이장님은 상규와 함께 새 파이프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손은 흙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어른들이 옆에서 훈수를 두기도 하고, 아이들은 신기한 듯 쪼르르 달려와 구경했다. 마치 오래된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처럼,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였다.

오후가 되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마침내 새 파이프 연결 작업이 끝났다. 이장님은 마무리 작업을 꼼꼼히 확인하고는 상규에게 펌프를 작동시켜 보라고 했다.

“자, 이제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올 일만 남았구먼!”

모든 시선이 공동 우물로 향했다. 상규가 펌프 손잡이를 힘껏 아래로 눌렀다. 끄윽, 끄윽. 몇 번의 소리와 함께, 투박한 철제 주둥이에서 시원하고 맑은 물줄기가 힘차게 뿜어져 나왔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넉넉하고 힘찬 물줄기였다.

“와아!”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김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우르르 달려가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 손을 갖다 대며 즐거워했다. 이장님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자, 서리골 우물 다시 살아났으니, 오늘 저녁은 제가 한턱 쏘겠습니다! 다들 마을 회관으로 모이세요!”

이장님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환호했다. 늦은 오후, 마을 회관에는 오랜만에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이장님은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며 빙그레 웃었다. 그의 눈에는 피곤함보다는, 함께 만들어낸 작은 기적에 대한 만족감과 서리골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 하루도 유쾌한 이장님의 손길 아래, 서리골은 더욱 단단하고 따뜻한 공동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일들이 이 이장님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