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저녁, 찬 바람이 창틈으로 스며들어 낡은 커튼을 흔들던 때였다. 계절의 마지막 기운이 숲의 나뭇가지들을 바싹 마른 뼈대처럼 남기고, 앙상한 가지 끝마다 매달린 미련마저 놓아주려는 듯한, 쓸쓸한 바람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내 마음에도 어쩐지 싸늘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래전 떠나보낸 기억들이 희미한 사진처럼 한 장 두 장 떠올라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고, 다가올 내일의 불확실성이 차가운 안개처럼 시야를 가렸다.
나는 익숙하게 창가에 놓인 낡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굳이 불을 켜지 않은 어스름한 방 안에서, 창밖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흐릿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그런 먹먹한 순간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질 만큼, 깊은 우울감이 나를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창밖에서 가느다란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양이 솔이였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나타나, 그 크고 깊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혹은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순간 거칠게 휘몰아쳤지만, 개의치 않았다. 솔이는 망설임 없이 창틀 위로 뛰어올라 익숙하게 내 무릎 위로 몸을 웅크렸다. 차가웠던 녀석의 털 속으로 내 손가락을 넣어 조심스레 쓰다듬자, 곧 나지막한 골골송이 울려 퍼졌다. 그 작은 진동이, 얼어붙었던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희미한 온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솔이야,” 나는 녀석의 부드러운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문득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이 들어. 애써 붙잡으려 했던 것들도 결국은 흐르는 물 같아서,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는 것 같아. 붙잡으려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는 그림자 같고….”
내 목소리는 힘없이 떨렸다. 오랜 세월 쌓아온 삶의 흔적들이 때로는 견고한 성처럼 느껴지다가도, 어떤 순간에는 한낱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낄 때가 있었다. 특히 오늘 밤이 그러했다. 지나온 시간들이 하나의 긴 터널 같았고, 나는 그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아 막막한 여행자 같았다.
솔이는 가만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짙푸른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고요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혼란과 번뇌가 그 눈동자에 닿는 순간 잠잠해지는 마법이라도 깃들어 있는 듯했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빛은 수천 마디의 위로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흐르는 물은 강이 되고, 강은 바다로 흘러가 새로운 생명을 품지 않느냐’고 묻는 듯이. ‘모든 것은 변하지만, 그 변화 속에 또 다른 의미와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고 말하는 듯이.
나는 솔이의 머리를 내 뺨에 기댔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나의 차가운 뺨에 스며들었다. 솔이의 털에서는 비와 흙, 그리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피어나는 풀잎의 냄새가 났다. 길고양이로 살아가는 삶은 얼마나 혹독할까. 매 순간이 생존의 연속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갈 텐데도, 솔이는 언제나 이토록 의연하고 평화로웠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솔이야? 매 순간을 오롯이 살아가는 것 같아. 지나간 것을 후회하지도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내 말에 솔이는 작게 “냐앙”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나는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야’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솔이의 삶의 방식이 곧 하나의 지혜임을 깨달았다. 흘러가는 것을 붙잡으려 애쓰기보다는, 흐름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나름의 자리를 찾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솔이를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안아 들어 올렸다. 녀석은 저항 없이 내 품에 안겨 가만히 있었다. 창밖의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바람 소리는 점차 희미해지고,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빛나고 있었다. 솔이의 따뜻한 온기가 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녀석의 심장 박동 소리가 내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작지만 힘찬, 생명의 박동이었다.
어쩌면 삶이란, 끝없이 흐르는 강물 위를 떠다니는 작은 조각배와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때로는 거친 파도에 흔들리고, 때로는 고요한 물결에 몸을 맡기며 흘러가는. 하지만 그 모든 흐름 속에서, 홀로 떠다니는 것 같아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솔이는 늘 내게 가르쳐주었다.
솔이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생각했다. 덧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작은 온기를 기억하자고.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생명의 따뜻함을 붙잡고, 그것이 주는 평화로운 위로를 온전히 받아들이자고. 길고양이 솔이가 내게 가져다준, 1082번째 대화의 결론은 늘 한결같았다.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