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낡은 창살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은회색으로 물든 하늘 아래, 고요한 설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한은 묵직한 두루마리를 든 채 창가에 섰다. 지난밤 내린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렸지만, 그의 마음속 그림자만큼은 지울 수 없었다. 1089번의 겨울이 오고 가는 동안, 수많은 눈꽃이 피고 졌지만, 그날의 약속은 여전히 그의 심장을 꿰뚫는 얼음 칼날 같았다.
잊혀진 약속의 그림자
궁정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오늘 아침 궐내 대신들은 이한의 처분을 두고 논의할 터였다. ‘태조의 서책’이라 불리는 낡은 두루마리에는, 이 나라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오래된 예언과 금지된 약속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정점에 이한, 그 자신이 서 있었다. 수세기 동안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온 약속, 그것은 겨울 눈꽃이 첫선을 보이는 날, 진정한 수호자가 나타나 봉인된 힘을 깨우고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으리라는 것이었다.
이한은 얇은 비단에 싸인 두루마리를 꽉 쥐었다. 거친 손가락 마디마디로 느껴지는 종이의 질감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유일한 끈처럼 여겨졌다. 잃어버린 존재, 윤서. 그녀를 찾아내고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그의 삶의 전부였다. 그러나 궐내 대신들은 그를 ‘망령에 사로잡힌 자’로 보았다.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과거의 유령을 좇는 어리석은 왕족이라 비난했다.
“전하, 소인들로서는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습니다.”
어젯밤, 가장 충직하다 여겼던 충신 박정우 대감이 찾아와 차갑게 뱉었던 말이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이한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비난과 실망,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연민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잃어버린 공주를 찾는 일은 전하의 개인적인 비원일 뿐입니다. 이미 10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는 백성들의 삶을 돌보시고,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에게 윤서는 전설 속의 인물일 뿐이지만, 이한에게는 생생한 기억 속의 존재였다.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던 그날, 작은 손을 맞잡고 영원히 함께하리라 맹세했던, 눈꽃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웠던 소녀였다.
얼어붙은 기억의 파편
문득, 두루마리에서 낯선 온기가 흘러나왔다. 이한은 손바닥을 폈다. 두루마리의 한 귀퉁이에 새겨진 작은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얼어붙은 연꽃 문양이었다. 윤서가 늘 지니고 다니던 목걸이에 새겨져 있던 문양과 똑같았다. 수없이 두루마리를 살펴봤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문양이었다.
머릿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기억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잊혀졌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연꽃이 겨울에 피어날 때, 우리의 약속은 다시 시작될 거예요.’ 그 약속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었다. 봉인된 힘을 깨우고, 이 세상을 지켜낼 더 큰 사명이 담겨 있었다.
이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몸속 깊숙이 잠들어 있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그에게 전해진 강력한 힘, 그리고 윤서의 존재가 그 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직감이었다.
“전하, 어찌 그리 급히 움직이십니까?”
시종이 놀라며 다가왔다. 이한의 얼굴에는 핏기가 돌았고, 눈빛은 이전과는 다른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난 사자처럼 보였다.
“폐하께 알현을 청할 것이다. 그리고 대신들에게도 나의 뜻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 이한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나는 그 약속을 이행해야만 한다.”
궐내의 찬 바람
정오가 되자, 궐내 대신들이 모인 조정 회의실은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창밖으로 보이는 설경만큼이나 대신들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한이 들어서자, 숙연했던 분위기는 더욱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좌장 격인 김영수 대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전하, 오늘 소인들이 전하를 모신 것은 더 이상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공주 윤서에 대한 집착은 이제 망상이 되어 백성들의 불안만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약속이라 함은, 지킬 수 있는 자에게만 유효한 것입니다.”
그의 말은 칼날 같았다. 대신들의 시선이 이한에게 꽂혔다. 이한은 침착하게 두루마리를 상석에 놓았다. 두루마리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빛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망상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계승해야 할 사명을 따르는 것이다. 너희가 ‘망상’이라 부르는 그 약속은, 이 나라의 태동과 함께 시작된 것이며, 이 땅을 지켜온 힘의 근원이다.”
이한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대신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이어갔다. “윤서 공주는 단순히 잃어버린 왕족이 아니다. 그녀는 약속의 핵심이며, 봉인된 힘을 깨울 열쇠이다. 그 힘이 없다면, 이 나라는 앞으로 닥쳐올 거대한 위협에 맞설 수 없을 것이다.”
대신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김영수 대감이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협이라니요? 전하의 마음속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 이 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전하의 무분별한 집착으로 인한 국력 소모와 백성들의 불신입니다!”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상궁이 급히 달려 들어왔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북방에서 기이한 징후가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빙하가 깨지며 알 수 없는 기운이 솟아나고 있으며, 그 기운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든 대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북방의 빙하는 수천 년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곳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되살아난 예언
이한은 천천히 두루마리를 펼쳤다. 얼어붙은 연꽃 문양이 새겨진 부분을 대신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문양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보아라. 태조의 서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만년빙이 깨지고 북방의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날, 겨울 연꽃이 피어나 잃어버린 약속의 증인이 되리라.’ 이 연꽃은 윤서 공주를 상징하며, 이 모든 것은 예언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이다.”
회의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상궁이 전한 소식과 이한이 펼쳐 보인 두루마리의 내용이 섬뜩하리만치 일치하고 있었다. 김영수 대감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역력했다.
“하지만… 공주는 어디에 계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그 약속이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한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쥐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작은 백옥 비녀를 꺼냈다. 눈꽃 모양으로 섬세하게 조각된 비녀였다. 그것은 그날, 눈꽃이 내리던 날 윤서가 이한에게 건네주었던 유일한 증표였다.
“그녀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봉인은 지금, 깨어지고 있다. 북방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윤서 공주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이며, 동시에 그녀를 가두었던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눈빛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나는 지금 당장 북방으로 떠날 것이다. 약속은 이제 시작될 것이다.”
대신들은 충격에 휩싸여 서로의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이한을 망상에 사로잡힌 왕족이라 비난했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은 그들의 모든 상식을 뒤엎고 있었다.
이한은 회의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등 뒤로, 백옥 비녀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마치 얼음꽃이 피어나는 듯한 빛이었다. 1089번의 겨울을 기다려온 약속의 서막이 마침내 오르고 있었다. 이한은 알고 있었다. 윤서를 찾아내고 그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단순한 재회를 넘어, 이 세상을 구할 유일한 길임을.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의 끝에는, 또 다른 눈꽃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차갑고 눈 덮인 북방을 향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