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병원 복도에 발소리가 울렸다. 서연은 유리창 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째 그치지 않는 눈은 세상을 온통 순백으로 뒤덮었고, 그 눈송이 하나하나가 마치 과거의 파편처럼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벌써 열흘째였다. 지훈이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지.
문득, 저 멀리서 아득한 환청처럼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햇살 아래 반짝이던 눈밭, 어린 지훈의 해맑은 미소. 그날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내렸더랬다. 작고 여린 손을 잡고, 솜뭉치 같은 눈을 함께 맞으며 나누었던 맹세.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지훈의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실내는 차가운 복도보다 더 서늘한 공기로 가득했다.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공간을 채울 뿐, 그 외의 모든 소리는 흡수된 듯 고요했다. 침대 위 지훈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 아래로 그의 가슴이 미약하게 오르내리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서연은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지훈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의 차가운 손을 잡아보았다. 그때 그날,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언덕에서 처음 잡았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작고 따스했던 온기는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서연은 애써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무수히 많은 전등이 박혀 있었지만, 그 빛은 지훈의 눈을 깨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의사는 방금 전에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골든타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기적에 기대야 할 때입니다.’ 기적. 서연은 그 단어를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삶의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고 믿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비웃듯, 현실은 잔혹하게 기적의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창밖의 눈은 더욱 거세졌다. 하얀 눈이 병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를 잠식하려는 듯, 서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눈꽃 아래 맹세
그날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초등학교 운동장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고, 아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눈밭을 뛰어다녔다. 지훈은 늘 그랬듯이, 서연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또래보다 유난히 작고 여렸던 서연은 추위도 잘 탔고, 쉽게 넘어지곤 했다. 그때마다 지훈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서연아, 약속해.”
눈사람을 만들던 지훈이 갑자기 몸을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은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무슨 약속?” 서연이 고개를 갸웃하자 지훈은 빙긋 웃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서로를 놓지 않기로 해. 저 눈꽃처럼 언제나 함께 있을 거야.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다음 생에도 같이 있자.”
아이의 입에서 나온 죽음이라는 단어가 조금 생경했지만, 서연은 지훈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눈송이가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응, 약속해. 우리 영원히 함께하자.’
그때는 몰랐다. 그 약속이 훗날 자신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얽매고, 또 얼마나 절실하게 매달리게 만들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이별의 순간에도, 그 약속만이 유일한 등불이 되어줄 것이라는 것을.
시간의 심판
“서연아, 또 여기 있니?”
병실 문이 다시 열리고 미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미영은 서연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오랜 친구였다. 그녀는 따뜻한 차가 담긴 보온병을 들고 들어와 침대 옆 간이의자에 앉았다.
“너도 좀 쉬어야 해. 어제는 집에 가서 한숨이라도 자라고 했잖아.”
“쉴 수가 없어, 미영아. 지훈이가 이렇게 있는데… 내가 어떻게 눈을 붙여.”
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영은 서연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친구의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었지만, 서연의 마음속 냉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지? 이제는 지훈이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미영의 조심스러운 말에 서연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야! 지훈이는 깨어날 거야. 우리 약속했잖아. 절대 놓지 않겠다고… 지훈이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미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서연이 지훈과의 약속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은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거대한 끈과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 끈은 두 사람을 옭아매는 족쇄가 되어버린 듯 보였다.
서연은 지훈의 손을 놓지 않았다. 차가운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약한 온기, 그마저도 없는 날이 올까 봐 두려웠다. 그날,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지치게 만들 줄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약속이 그녀를 살아 숨 쉬게 하고, 지훈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했다.
흩날리는 희망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어둠이 내리고 병실은 더욱 고요해졌다. 서연은 잠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것인지,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를 희미한 경계에서, 다시 눈밭을 뛰어다니는 어린 지훈의 모습이 보였다.
‘서연아, 나는 괜찮아. 네가 행복해야 해. 약속, 잊지 마.’
환청인가. 아니면 지훈의 마지막 목소리인가. 서연은 번쩍 눈을 떴다. 그리고 그때였다. 손을 잡고 있던 지훈의 손가락이 미약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낀 것은.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서연은 숨을 멈추고 지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꿈이 아니었다. 그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이.
“지훈아…!”
서연은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번 눈물은 절망이 아닌, 희망의 눈물이었다. 그녀는 다급히 콜 벨을 눌렀다. 병실 문이 열리고 의료진들이 허둥지둥 들어왔다. 분주한 움직임 속에서도 서연은 지훈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온기는, 겨울 눈꽃 아래 맺었던 약속이 아직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어쩌면 기적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계속 찾아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 눈꽃처럼 차갑고 시린 현실 속에서도, 그 약속은 두 사람의 영혼을 이어주는 끈이 되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지훈의 손을 잡은 채, 서연은 속삭였다.
“지훈아, 약속했잖아. 우리, 영원히 함께하기로…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절대.”
창밖의 눈은 여전히 거세게 흩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서연의 마음속에는 이제 더 이상 차가운 겨울 바람이 불지 않았다. 그곳에는 지훈과의 약속, 그리고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다음 계절, 봄의 햇살 아래에서 지훈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수 있을까. 서연은 그 약속의 힘을 믿으며, 지훈의 곁을 지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