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창밖으로 줄기차게 내렸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길게 흔적을 남기며 흐르는 모습이, 마치 잡을 수 없는 시간의 강물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희미한 흙냄새와 낙엽 썩는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 익숙한 냄새 속에서 나는 또다시 지난 시간의 한 조각을 더듬고 있었다.
내 무릎 위에는 달이가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녀석의 얕은 숨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웠다. 따뜻한 체온이 바지를 통해 스며들어와, 오래도록 차갑게 굳어있던 내 안의 어떤 부분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나는 달이의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녀석은 꿈속에서 작은 발을 움찔거릴 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 작은 고양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리 없는 언어, 눈빛과 몸짓,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공명으로. 녀석은 내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감정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가장 깊숙이 감춰둔 질문들을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또 그 시간을 붙잡고 있구나, 인간.”
환청처럼, 혹은 내 안의 목소리처럼 달이의 메시지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고, 내 안의 먹구름 같은 기억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때의 일이었다. 용기가 부족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에 눈이 멀었던 것인지, 나는 결국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외면하고 말았다. 후회는 바다처럼 깊었고, 그 기억은 썩어가는 상처처럼 내 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후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수정할 수 없는 가장 잔인한 감정이었다. 달이는 언제나 나의 이런 회한을 감지해왔다. 녀석은 내 무릎 위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호박색 눈동자가 창밖의 빗물처럼 아련한 빛을 담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야. 그 모든 것은 결국 너의 일부가 되지.”
녀석의 눈빛 속에서 그런 말을 읽었다. 녀석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얼굴을 향해 앞발을 뻗었다. 그리고는 아주 부드럽게, 나의 뺨을 건드렸다. 그 작은 촉감이 차갑던 나의 뺨에 온기를 전했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말이야. 잊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잊힌 채로 오히려 더 큰 힘을 가지기도 해. 사라지지 않고 너의 그림자가 되어 네 발자국마다 함께하는 것처럼.”
빗소리는 여전히 창을 때렸다. 나는 달이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잊힌 채로 더 큰 힘을 가진 그림자라니. 어쩌면 내가 놓아버렸다고 생각한 그 모든 것들이, 실은 내 안에서 다른 형태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가지 않은 길, 내가 하지 못한 말, 내가 붙잡지 못한 용기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데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으리라.
나는 달이를 품에 안았다. 녀석은 작은 심장을 내 가슴에 맞대고 가르릉거렸다. 그 진동이 내 몸을 타고 흘러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후회와 아쉬움이 비처럼 흘러내리는 동안, 달이의 따뜻함은 그 모든 것을 말없이 감싸 안는 거대한 위로 같았다.
비는 언제쯤 그칠까. 그리고 나는 언제쯤 이 지난날의 그림자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달이는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내 어깨에 기댄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녀석의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생명의 온전함이, 모든 질문에 대한 가장 명확한 답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다른 모양으로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달이처럼, 언제나 내 곁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