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가 사무실 창문을 두드리는 밤이었다. 낡은 시계는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우는 손때 묻은 서류들을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십여 년간, 셀 수 없이 많은 실마리를 쫓았지만, 그의 첫사랑 서연의 흔적은 언제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았다.
그때, 정우의 낡은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강형사. 심장이 순간적으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강형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차분했지만, 그 속엔 분명 긴급함과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정우 씨, 드디어 실마리가 잡혔습니다. 확실합니다.”
정우는 숨을 들이켰다. “어디입니까?”
“구도심 외곽의 버려진 연구소 건물, 코드명 ‘에코’. 몇 년 전 폐쇄된 곳인데, 최근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 제가 보낸 사진들 확인해 보십시오.”
정우는 강형사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둠 속에 잠긴 낡은 건물 사진 몇 장과, 그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을 포착한 사진이 있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수천 번의 좌절과 희망이 교차했던 지난 세월. 이젠 정말 끝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전신을 감쌌다.
정우는 망설일 틈도 없이 차 키를 움켜쥐고 사무실을 나섰다.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빗물은 그의 오랜 갈증을 식히기보다, 오히려 더 뜨겁게 달구는 듯했다. 구도심 외곽으로 향하는 길은 더욱 음산하고 어두웠다. 가로등은 드문드문 꺼져 있었고, 이따금씩 번개가 번쩍이며 회색빛 하늘을 갈랐다.
얼마를 달렸을까. 낡고 녹슨 철제 펜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너머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낡은 건물 한 채가 서 있었다. 폐쇄된 연구소, 코드명 ‘에코’. 건물 외벽은 이끼로 뒤덮여 있었고, 깨진 창문들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간간이 새어 나오는 빛줄기가 내부는 물론 외관마저 음산하게 만들었다.
정우는 차를 멀찍이 세우고 천천히 건물로 향했다. 빗줄기는 여전히 거셌고,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조심스럽게 낡은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를 감쌌다. 그의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실망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번엔 정말이라는 희망이 뒤섞여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 잠긴 복도를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예리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낡은 장비들이 나뒹구는 실험실들을 지나, 마침내 저 멀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보였다. 정우는 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 속에서 사람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문 옆에 난 작은 유리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희뿌연 유리창 너머로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느다란 목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칼… 정우의 세상이 멈추는 듯했다. 그의 뇌리 속에서 수없이 재생되던 영상 속의 그녀였다. 서연.
그녀는 낡은 목재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창백한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빛은 마치 오랜 시간 길을 잃은 사람의 그것과 같았다. 정우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랜 시간 그를 괴롭혔던 죄책감과 그리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바로 그때였다. 방 안의 낡은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낯선 남자가 들어섰다. 단정한 슈트 차림의 남자는 서연에게 다가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서연은 남자의 손길에 순간적인 동요가 스치는 듯했지만, 이내 감정을 숨긴 채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마치, 덧없는 희망마저 빼앗긴 채 감옥에 갇힌 새처럼 보였다.
정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꿈꿔왔던 재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의 고통과 희생 끝에 마침내 마주한 그녀는, 그가 알던 서연이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 있었지만, 자유롭지 못했고, 어딘가 깊은 그림자에 갇힌 듯 보였다. 사랑스러운 미소도, 장난기 가득한 눈빛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남자는 서연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서연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그들의 대화는 들리지 않았지만, 정우는 그 미묘한 순간들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의 행동에는 다정한 듯하면서도 묘한 지배적인 기운이 감돌았고, 서연의 태도에는 체념과 무기력이 배어 있었다.
정우는 이성을 붙잡으려 애썼다. 지금 당장 뛰어들어가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오랜 세월 탐정으로 살아오며 쌓아온 냉철함과 인내심을 총동원했다. 서연이 이곳에 왜 있는지, 저 남자와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무기력하게 만들었는지, 정우는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그는 서연을 되찾기 위해 지난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난 1103번의 좌절은 단지 이 순간을 위한 발판이었을 뿐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정우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깊은 눈으로 유리창 너머의 서연을 응시했다. 그의 심장 속에는 더 이상 희망만 남아있지 않았다. 뜨거운 분노와 함께, 그녀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