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109화

밤이 깊어가는 시각, 도시의 불빛들이 낮게 깔린 안개처럼 흐릿해지는 고요 속에,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스튜디오는 작은 우주선처럼 아늑하게 빛나고 있었다. DJ 지혜는 언제나처럼 매끄러운 손길로 원고를 넘기고, 이어폰을 고쳐 썼다. 차분하고 따뜻한 목소리, 그것이 그녀가 지난 십수 년간 이 밤을 지켜온 방식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고민과 기쁨,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통해 별처럼 반짝였다.

방송 시작까지 채 십 분도 남지 않은 시간, 그녀는 마지막으로 도착한 사연들을 훑어보았다. 익숙한 이름들, 간절한 사연들 사이로 불쑥 끼어든 한 장의 낡은 편지가 지혜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잉크가 번진 듯한 흐릿한 필체, 보내는 사람의 주소는 비어있었다. 겉봉투가 너덜너덜한 것이 오랜 시간 그녀에게로 오기 위해 헤매었음을 짐작게 했다.

지혜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한 장의 빛바랜 종이와 찢어진 오래된 사진 한 조각이었다. 종이에는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오랜 친구에게. 별똥별이 쏟아지던 밤, ‘그 노래’를 기억해? 다시 들을 수 있을까.” 그리고 신청곡 제목이 적혀 있었다. <밤의 등대>라는, 아주 오래된 인디 밴드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곡이었다.

지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밤의 등대>. 그 노래는, 그녀의 기억 속 아주 깊은 곳, 먼지 쌓인 상자 속에 고이 잠들어 있던 이름 하나를 강렬하게 불러냈다. 준우. 밤하늘을 보며 꿈을 이야기하던 어린 시절의 친구. 별을 사랑했고, 라디오를 사랑했던 그 아이. 십여 년 전, 도시의 밤하늘 아래서 함께 들었던 그 노래.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우연일 리가 없었다. 그 필체, 그 노래, 그리고 ‘별똥별이 쏟아지던 밤’이라는 문구. 그것은 그들만의 암호였다. 지혜는 사진 조각을 응시했다. 깨진 모서리, 흐릿한 얼굴. 그 작은 조각만으로는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준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제 와서? 왜 이런 식으로?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DJ님, 1분 전입니다!”

막내 작가 은수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불러왔다. 지혜는 서둘러 편지와 사진 조각을 원고 더미 아래 숨겼다. 가면을 써야 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오직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의 DJ 지혜일 뿐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그녀는 마이크 앞에 앉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별을 헤는 밤, 잊혀진 기억들을 찾아

시그널 음악이 흐르고, 지혜의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혜입니다. 오늘 밤도 이렇게 깊어가는 밤을 함께 밝혀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밤은 왠지 모르게, 저 멀리 반짝이는 별들처럼, 우리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기억들이 문득 떠오르는 밤이네요.”

그녀는 늘 그렇듯 잔잔하게 오프닝 멘트를 이어갔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실렸다. ‘잊혀진 기억’, ‘오래된 별’, ‘그리움’. 평소 같으면 아름다운 은유로 들렸을 단어들이 그녀 자신에게는 날카로운 조각칼처럼 다가왔다. 첫 번째 사연을 읽는 동안에도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원고 아래 숨겨둔 편지 봉투로 향했다. 준우. 그 이름은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토록 생생하게 가슴 한 켠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 청취자의 사연이 흘러나왔다. 오래 전 이사를 가며 헤어진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이었다. “어릴 적 함께 심었던 나무는 아직 그 자리에 있겠죠? 저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친구가 생각나요. 그 친구도 저를 기억할까요, DJ님?”

지혜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물론이죠. 어떤 기억들은 나무처럼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어떤 기억들은 별빛처럼 영원히 반짝입니다. 설령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더라도, 그 마음속의 별빛은 언젠가 다시 길을 밝혀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녀의 말이 위로가 되었으면 했지만, 사실 그 말은 그녀 스스로에게 던지는 주문과도 같았다. 준우도 나를 기억할까? 우리에게도 심었던 나무 같은 기억이 있었지.

방송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진행이었다. 하지만 지혜의 내면은 폭풍우가 몰아치듯 요동치고 있었다. 그 편지, 그 노래는 분명 준우가 보낸 것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직접 연락하지 않고, 라디오를 통해 이런 식으로 다가온 것일까? 그녀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그녀가 그 노래를 틀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그 답답함과 알 수 없는 설렘이 그녀를 짓눌렀다.

중간 광고가 나가는 시간, 스튜디오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지혜는 굳은 얼굴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작가 은수가 걱정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DJ님, 괜찮으세요? 조금 피곤해 보이세요.”

“아니, 괜찮아. 잠시 숨이 막혀서.” 지혜는 애써 웃어 보였다. 숨이 막힌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십 년 넘게 잊고 지내려 했던 과거가 다시금 그녀의 목을 조여오는 듯했다.

밤의 등대

광고가 끝나고 다시 마이크가 켜졌다. 지혜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 밤을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원고 더미 아래 숨겨둔 편지를 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이번 밤, 마지막 곡으로 그 노래를 틀기로 결심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오늘 밤, 여러분에게 들려드릴 마지막 곡은, 한 익명의 청취자님께서 신청해주신 곡입니다. 별똥별이 쏟아지던 밤의 기억처럼, 어쩌면 잊고 지냈던 오래된 약속처럼, 우리 마음속 어딘가에 등대처럼 빛나고 있는 노래가 아닐까 싶어요.”

지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깊고, 미묘하게 떨렸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곡을 소개했다. “오래 전 밴드 ‘은하수’의 곡입니다. <밤의 등대>.”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가 스튜디오를 채웠다. 기타 선율과 보컬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멀리 별빛은 흐릿하고, 길 잃은 나는 어디로 가나. 밤의 등대가 되어주오, 잊혀진 약속 위에 빛나주오…”

지혜는 감은 눈으로 노래를 들었다. 준우와 함께 들었던 그 시절의 풍경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수많은 별들, 나란히 앉아 서로의 꿈을 이야기했던 두 아이. “언젠가 우리가 헤어져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서로를 기억하자.” 준우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고, 지혜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오래된 등대 하나가 켜졌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밤하늘에도 언제나 별이 빛나기를.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혜였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시그널 음악과 함께 방송이 마무리되었다. 마이크를 끄자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에 잠겼다. 지혜는 긴장이 풀린 듯 의자에 기대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그 편지를 꺼내들었다. 종이의 맨 마지막, 신청곡 제목 아래에 아주 작게, 그녀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시가 있었다. 어린 시절, 비밀 편지를 주고받을 때마다 서로에게 보냈던 작은 별 모양의 그림. 흐릿한 잉크로 겨우 형태만 남아 있었지만, 분명 그것이었다.

지혜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준우가 보낸 것이 확실했다. 그는 정말로 돌아온 것이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고 지냈던, 혹은 잊으려 애썼던 존재가 다시 그녀의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왜 이제 와서? 무엇을 원해서? 그녀는 그 편지를 꼭 쥐었다. 마치 그 편지가 준우의 온기를 전해주는 듯했다.

창밖을 보았다. 도시의 불빛 너머로 드문드문 별들이 반짝였다. 그 별들 중 어딘가에 준우의 시선도 닿아있을까? 그가 이 노래를 듣고 있었을까? 지혜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심장은 새로운 미지의 길을 앞둔 여행자처럼 두근거렸다. 별이 빛나는 밤, 잊었던 과거가 그녀의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그 문을 열어야 할지, 아니면 영원히 닫아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의 밤은 더 이상 예전처럼 고요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