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1142화

차가운 겨울의 기억을 털어내듯, 비로소 땅을 박차고 솟아나는 생명들의 기지개 소리가 온 대지에 가득했다. 은채의 낡은 한옥 처마 끝에도 갓 피어난 새싹들이 여린 연둣빛을 뽐내며 매달려 있었고, 댓돌 아래 놓인 화분에서는 이름 모를 꽃봉오리들이 앞다투어 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봄바람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솜털처럼 부드럽고, 아련한 향기를 실어 나르는 듯했다. 봄은 그렇게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은채의 마당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었다.

은채는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마루에 앉아 찻잔을 들었다. 갓 우려낸 따뜻한 국화차에서 피어나는 김이 잔잔한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그녀의 눈가를 살짝 흐렸다. 지난 몇 년간, 그녀의 삶은 이 차처럼 고요하고, 때로는 흐릿했다. 도시의 번잡함을 뒤로하고 이 한적한 마을에 정착한 지도 벌써 오 년. 시간은 모든 것을 무디게 한다지만, 어떤 그리움은 마치 계절처럼 반복되어 찾아오곤 했다.

그녀의 시선은 마당 한켠의 오래된 감나무에 멈췄다. 앙상했던 가지마다 연둣빛 물이 오르고 있었다. 저 나무는 몇 번의 봄을 더 맞이해야 온전히 푸르게 잎을 틔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또 몇 번의 봄을 견뎌내야 다시 예전처럼 싱그러워질 수 있을까. 은채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봄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그 희망조차 버거운 계절일 수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대문을 여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어르신들의 안부나, 가끔 찾아오는 약재상만이 들르던 문이었다. 은채는 고개를 돌렸다. 덩치 큰 우체부 아저씨가 커다란 편지 봉투를 든 채 서 있었다. “은채 씨 댁이죠? 등기입니다.”

등기라니. 은채의 손은 순간 얼어붙었다. 이곳에 이사 온 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것이었다. 낯선 상황에 심장이 불안하게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우체부에게 다가가 서명을 했다. 두툼한 봉투는 차가웠다. 발신인 주소는 보이지 않았고, 발신인 이름은 ‘한성 연구소’라고만 인쇄되어 있었다.

차를 마시던 자리에 다시 앉았지만, 더 이상 차 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봉투를 만지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혹시, 하는 아주 작은 기대와 함께 더 큰 두려움이 밀려왔다. 지난 오 년간, 그녀는 ‘혹시’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삼키며 살아왔다. 모든 희망을 내려놓고 평온을 가장하며 살았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낯선 봉투가 그녀의 잠들어 있던 감정들을 다시 깨우는 것만 같았다.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여러 장의 서류와 함께 얇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서류들은 온통 어려운 용어들로 가득한 연구 보고서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레 가장 얇은 종이로 향했다. 그 종이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은채 씨에게, 이 소식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봄이겠군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은채의 손에서 찻잔이 떨어져 깨질 뻔했다.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글씨를 다시 훑었다. 이 글씨체는… 이 목소리는…

<나는 살아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이제 겨우 당신에게 이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되었어요. 내가 사라진 후, 당신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용서해 달라는 말도 감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나는 한성 연구소의 도움으로 이곳에서 많은 것을 연구했고, 이제 당신 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습니다.>

지훈. 그 이름이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오 년 전, 사고로 사라졌던 그녀의 연인, 강지훈. 모두가 그가 사망했다고 확신했고, 은채만이 막연한 희망을 품고 버텼었다. 그리고 결국 그 희망마저 놓아버린 채 이 외딴곳으로 숨어들었었다. 그런데, 살아있다니. 그리고 자신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있다니.

은채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은 국화차의 온기보다 뜨거웠고, 봄바람의 부드러움과는 대조적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는 듯했다. 그녀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것은 환상일 거야.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이 만들어낸 헛된 망상일 거야. 하지만 손에 쥐어진 편지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나머지 서류들을 급하게 훑어보았다. 그것은 지훈이 참여했던 극비 프로젝트에 대한 보고서 같았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는 연구’. 겉으로는 터무니없는 이야기 같았지만, 그가 사라진 배경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었다. 지훈은 그 연구의 핵심 인물이었고, 사고는 그의 실험 도중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고로 인해 그는 다른 차원의 공간에 갇혔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돌아올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의 편지는 계속 이어졌다.

<많은 것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당신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오직 당신 곁뿐입니다.>

편지의 마지막 줄은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 한성 연구소로 와주세요.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로 끝맺고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그의 문장들은 여전히 그답게 간결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은채에게는 그저 막연한 약속이었다. 다음 보름달이라니. 앞으로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

편지를 손에 든 채, 은채는 마루에 주저앉았다. 발치에 깨진 찻잔 조각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그녀의 머릿속은 오 년 전, 지훈과의 마지막 기억들로 가득 찼다.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 뜨겁게 맞잡았던 손, 그리고 곧 다시 돌아오겠다던 그의 약속. 그 약속이 이렇게 뒤늦게 지켜질 줄이야. 아니, 정말 지켜지는 것일까.

그녀는 마당을 가로지르는 봄바람을 느꼈다. 그 바람은 감나무의 연한 새싹을 흔들고, 댓돌 위 꽃잎을 흩날렸다. 그 바람이 정말 지훈의 소식을 전해준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또 다른 잔인한 환상일까.

은채는 편지를 가슴에 품었다. 식지 않은 그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다시 촉촉해졌지만, 이번에는 눈물 너머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잊었던 감정, 바로 ‘희망’이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그녀에게 선택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지훈을 만날 용기가 있을까? 아니, 만날 수 있을까? 오 년의 시간 동안 변해버린 것은 비단 그녀의 삶만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이 편지, 봄바람이 전해준 이 기적 같은 소식은 그녀의 모든 것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은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어딘가 강한 결심을 담고 있었다. 그녀의 오랜 침묵이 깨지고,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