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리는 시계 – 제359화

잊혀진 시간의 무게

이지훈은 낡은 서재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의 보라색 노을이 희미하게 스며들어왔지만, 그의 눈빛에는 그 어떤 따스함도 스며들지 않았다. 손목에는 언제나 그랬듯 고동색 가죽 시계가 채워져 있었고, 그 시계의 태엽은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째깍거리는 소리 대신, 그의 귓가에는 수없이 되감아지고 다시 써진 시간의 환영이 맴돌았다.

358번의 밤과 낮.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 그는 이 시계를 통해 수많은 선택의 순간을 되돌리고, 수많은 후회를 지워내려 했다. 그러나 시간은 지우개로 쓴 연필 글씨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워진 흔적 위에 새로운 이야기가 덧입혀질수록, 이전의 흔적은 희미한 유령이 되어 그의 의식 속에 남았다.

그는 천천히 책상 위를 쓸었다. 닳아 해진 목재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먼지가 앉은 램프, 빛바랜 책들, 그리고 작은 유리 장식품… 이 모든 것이 저마다 다른 시간의 겹을 품고 있는 듯했다. 지훈은 손끝으로 램프를 쓸어보고는 픽, 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수많은 시간대 중 하나에 불과한 환상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환영 속의 그녀, 서연

“지훈 씨, 여기요.”

환청이었다. 언제나처럼 선명하고 따스한 목소리. 그의 심장이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서재의 문턱에 그녀가 서 있었다. 흰색 블라우스에 연한 베이지색 치마를 입고, 한 손에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들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 책, 드디어 찾았네요. 지훈 씨가 한참 찾았던 거 아니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책을 건네주려 손을 내밀었다. 지훈은 그녀의 손에 닿으려 했으나,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서연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저 그의 기억이 만들어낸, 지울 수 없는 환영일 뿐이었다.

수많은 시간선을 오가며 그가 가장 지키고 싶었던 사람, 서연. 그는 그녀의 죽음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시계를 되감았다. 그리고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그때’로 돌아가 그녀를 살리려 애썼다. 어떤 시간선에서는 그녀의 사고를 막았고, 어떤 시간선에서는 그녀의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시간선에서 서연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곁을 떠났다. 시간이 아무리 바뀌어도, 그녀가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무는 순간은 오지 않았다. 마치 시간 자체가 그녀를 그에게서 떼어내려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깨달았다. 시계는 과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의 시간선을 선택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의 대가로, 그는 매번 그녀를 잃는 고통을 다시 겪어야 했다. 이제 서연의 모습은 그의 기억 속에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웃는 서연, 우는 서연, 화내는 서연, 잠든 서연… 셀 수 없는 모습의 그녀들이 그의 뇌리에서 겹쳐지고 부서졌다.

시간의 파편들

그는 손목의 시계를 천천히 벗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에 닿았다.

“너는… 나에게 무엇을 주었지?”

그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답 없는 질문이었다. 이 시계는 그에게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무너뜨렸다. 그는 이제 과거의 행복한 기억조차 온전히 누릴 수 없었다. 그 모든 기억이 다른 시간선에서 온 것일까 봐,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환영일까 봐 두려웠다.

최근 들어, 시계를 사용하지 않을 때에도 미세한 시간의 균열이 느껴졌다. 어제 분명히 책상 위에 두었던 물건이 다른 곳에 놓여 있다거나, 며칠 전 만났던 사람의 이름이 불현듯 다르게 기억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작은 균열들은 점점 커져갔고, 그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그는 마치 거울이 깨져버린 채 수많은 조각들을 억지로 맞추며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을 보았다. 그 꿈속의 그는 이 시계를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서연과 함께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면 그 모든 행복은 허망한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차가운 현실만이 그를 반겼다. 그는 자신이 어떤 시간선의 이지훈인지, 진정한 ‘나’는 누구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멈춰버린 바늘

지훈은 시계를 다시 손목에 채웠다. 그리고는 습관처럼 태엽을 감았다. 끼릭, 끼릭. 낡은 시계의 톱니바퀴가 마찰하는 소리가 서재를 채웠다. 그는 수없이 많은 후회와 함께 이 태엽을 감아왔다. ‘다시 한 번만…’, ‘이번에는 다를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시간을 되감았다.

그러나 오늘, 그의 손가락은 태엽을 완전히 감지 못하고 멈춰 섰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시계의 바늘은 5시 37분을 가리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멈춰버린 시간.

그는 깨달았다. 아무리 애써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시간선에서도, 그녀는 그의 곁에 영원히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시간선을 오가며 그가 지켜내려 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영이었다는 것을. 진실은 잔인했다.

두 눈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메마른 눈물이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울 힘도 없었다. 그저 텅 빈 시선으로 창밖의 어둠을 응시할 뿐이었다. 서연을 살리려 했던 그의 수많은 시도들은 결국 그 자신을 끝없는 시간의 미로 속에 가두고 말았다.

“서연아…”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이름은 메아리 없이 서재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 순간, 멈춰 있던 시계의 바늘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5시 38분.

아주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한 칸 전진한 시간.

이지훈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되감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희미하지만 확실한 속도로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수없이 멈추고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던 그의 시계가, 이제야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한 칸의 전진이 그에게 가져다줄 의미는 무엇일까.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그의 시선이 서재 한구석의, 전에 없던 낡은 편지 봉투에 닿았다. 봉투 위에는 낯선 필체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잊혀진 시간의 조각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듯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