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의 손에 들린 낡은 사진 한 장이 미세하게 떨렸다. 흐릿한 인화지 속에는 스물 남짓한 서연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캔버스 위에 붓질을 하던 그 모습. 3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기억 속 서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빛을 찾아 낯선 도시의 허름한 골목 끝, ‘달무리 화랑’이라는 간판 아래 서 있었다.
내부로 들어서자 쿰쿰한 먼지와 유화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강준을 맞았다. 작은 공간을 채운 그림들은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강준의 시선은 한 벽면의 작은 풍경화에 꽂혔다. 그 그림은 놀랍도록 익숙했다. 수십 년 전, 서연이 즐겨 그리던 특유의 붓 터치, 색감, 그리고 구석에 작게 새겨진, 어린 시절 강준만이 알아볼 수 있었던 그녀만의 이니셜. ‘S.Y.’.
강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수많은 헛된 제보, 끝없는 실망, 그리고 희미해지는 희망 속에서 그는 수도 없이 이런 순간을 맞았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그의 직감이, 뼛속 깊이 새겨진 기억이 이 그림이 그녀의 것임을 외치고 있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림 앞으로 다가섰다. 그림 속에는 오래된 벚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강준과 서연이 처음 만나 함께 앉았던, 그 벚나무였다.
“저… 이 그림 그린 화가에 대해 여쭤볼 수 있을까요?”
강준의 목소리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미약하게 떨렸다. 카운터에 앉아 뜨개질을 하던 백발의 노파가 고개를 들었다. 화랑 주인인 듯했다.
“아, 그 그림 말인가? 익명으로 작품을 맡기는 분이 계시지. 참 특이한 분이야.”
익명. 그 한 단어에 강준의 가슴은 다시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서연은 언제나 자신의 작품에 자부심을 가졌고, 숨기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익명으로 활동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녀가 변해버린 것일까.
“혹시… 그분 이름이라도 아시는지…”
“글쎄, 본인은 한 번도 말한 적 없어. 그저 작품만 놓고 가곤 하지. 돈에는 관심도 없는 분이야.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동네에 사는 게 분명해. 가끔 시장에서 마주치곤 하거든.”
강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동네? 수십 년간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갔던 그가, 이제야 그녀가 이 작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단서를 얻은 것인가. 이 모든 긴 세월이 고작 몇 블록 안에서 허비되었다는 사실에 허탈감과 함께 강렬한 희망이 밀려왔다.
“그분… 혹시 어떤 모습인지라도…” 강준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파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빙긋 웃었다.
“글쎄… 늘 똑같은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다녀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아. 하지만 한 가지 특이한 게 있지. 그녀는 늘 손목에 작은 은 팔찌를 하고 있어. 벚꽃 문양이 새겨진….”
강준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벚꽃 문양의 은 팔찌. 그것은 그가 고등학생 시절, 서연의 생일 선물로 직접 만들어주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팔찌였다. 너무 낡아버려 이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팔찌가, 아직 그녀의 손목에 남아있다는 것인가.
“제가… 꼭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혹시 어디에 사시는지….” 강준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노파는 강준의 절박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젊은이, 대체 그분이 누구이기에 이리 애를 태우나… 그래, 딱 한 번, 우연히 보게 된 적이 있어. 이 골목을 따라 쭉 내려가면 작은 빵집이 하나 있는데… 그 빵집 맞은편, 오래된 회색 대문 집에서 나오는 걸 봤지.”
강준은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570번의 절망 끝에, 571번째 희망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그는 노파에게 황급히 감사를 표하고 화랑을 뛰쳐나왔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오래된 회색 대문 집. 수십 년간 찾아 헤매던 그녀가, 이제 그 몇 걸음 앞에 있었다. 과연 그 문을 열면, 그토록 그리던 서연이 서 있을까. 그의 심장은 이제 기대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격렬하게 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