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자정의 고요를 지나 새벽의 초입으로 막 접어들고 있었다. 거리에 켜진 가로등 불빛마저 스러질 듯 희미해진 시간, 낡은 골목 안쪽 깊숙이 자리 잡은 ‘꿈을 파는 상점’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은은한 호박색 불빛은 먼지 쌓인 진열장 안,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액체들이 담긴 유리병들을 비추고 있었다. 병마다 붙은 손글씨 라벨에는 저마다 다른 이름들이 쓰여 있었다. ‘첫사랑의 맹세’, ‘잊힌 여름날의 웃음’, ‘미래를 향한 용기’… 이 세상 모든 형태의 꿈들이 유리병 속에 잠들어 있었다.
상점의 주인장, 백발에 구부정한 등, 그러나 형형한 눈빛을 지닌 노인은 묵묵히 카운터에 앉아 고서적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오랜 단골이자 때로는 유일한 손님이기도 한 이하루가 문을 열고 들어설 때까지, 상점의 시간은 늘 그렇게 고요하고 느리게 흘러갔다. 낡은 풍경이 ‘딸랑’ 하고 맑은 소리를 내며 하루의 방문을 알렸다.
“주인장님, 아직 주무시지 않으셨네요.” 하루의 목소리는 밤공기처럼 촉촉했다. 그녀는 피곤에 지친 듯 보였지만, 눈빛은 어떤 간절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이 어깨 위로 흩어졌다.
노인은 읽던 책을 덮지도 않고 고개를 살짝 들어 하루를 맞았다. “올 줄 알았다. 네 발걸음 소리는 늘 같으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연륜과 함께 알 수 없는 피로가 묻어 있었다. “무슨 꿈을 찾으러 왔느냐. 오늘은 또 어떤 현실이 너를 지치게 했지?”
하루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진열장을 가득 채운 꿈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처 없이 떠돌았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꿈을 찾고 있어요. 며칠째 잠 못 이루고 있어요. 자려고 눈을 감으면, 그 사람의 얼굴이 자꾸만 선명해져서….”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주인장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잊고 싶은 꿈인가, 아니면 다시 꾸고 싶은 꿈인가.” 주인장의 질문은 언제나 핵심을 꿰뚫었다.
“둘 다요… 아니, 어쩌면… 잊을 수 없으니 차라리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요. 아주 잠시라도, 꿈속에서라도 다시 그 온기를 느끼고 싶어요.” 하루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그녀가 상점을 찾은 지 벌써 일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잠’, 그다음에는 ‘잔잔한 위로’,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의 재회’를 원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은 나이 탓인지, 아니면 꿈을 다루는 자의 숙명인지 모를 느릿함으로 가득했다. 그는 진열장 가장 깊숙한 곳, 다른 병들보다 유난히 고색창연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병 안에는 마치 영롱한 은하수를 압축해 담은 듯한 오묘한 빛깔의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희미하게 퍼지는 복숭아꽃 향기,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슴 저릿한 서늘함이 느껴졌다.
“이 꿈은… ‘되감는 시간의 강’이라 부른다. 네가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으로 너를 데려다줄 것이다. 하지만 대가가 따른다. 그 순간에 머무는 동안, 현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은 잠시 잊히겠지만, 돌아왔을 때 그 공허함은 더욱 깊어질지도 모른다.” 주인장은 병을 하루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은 주름졌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하루는 떨리는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다. “괜찮아요. 지금의 고통보다 더 깊은 공허함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좋아요.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결정되어 있었다. 현실의 고통이 아무리 깊어도, 그 고통을 잠시 잊게 해줄 한순간의 꿈이 더욱 간절했다.
“꿈을 마시는 법은 알지?” 노인이 나지막이 물었다.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병을 들고 상점 안쪽, 늘 꿈을 마시던 낡은 의자에 앉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그녀는 병마개를 열었다. 달콤하면서도 아련한 향기가 공기 중에 퍼져나갔다. 은하수 같은 액체를 조심스럽게 입술로 가져갔다. 한 모금, 두 모금…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고, 상점의 불빛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운 날의 온기
어둠 속을 한없이 유영하는 느낌. 그리고 이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시간은 5년 전, 늦여름의 어느 주말이었다. 시골의 작은 집 마루에 앉아 수박을 먹던 때였다. 뜨겁게 내리쬐던 햇살, 마당에 드리워진 감나무 그늘, 그리고 무엇보다… 옆자리에 앉아 씨를 뱉으며 웃고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강현이었다.
“하루야,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수박 귀신이 네 수박 다 뺏어 먹는다?” 강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 장난기 어린 목소리,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했다. 마치 어제 일처럼.
하루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애써 참으며 웃었다. “무슨 소리야, 오빠. 내가 오빠보다 훨씬 빨리 먹을걸?” 그녀는 꿈속임을 알면서도, 그가 사라질까 두려워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노력했다. 마주 보는 눈빛 속에 그리움과 슬픔이 교차했다. 하지만 강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선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처럼.
“오늘은 하늘이 정말 예쁘다, 그치?” 강현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먹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흰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나중에 우리 저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같이 뛰어놀자. 내가 너 번쩍 안아 올려줄게.”
“오빠는 농담도 참.” 하루는 피식 웃었지만, 마음속에서는 무언가가 뭉클하게 차올랐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애틋했다. 그녀는 강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웃음소리, 햇살에 반짝이는 머리카락, 여름 바람에 살랑이는 옷깃… 모든 것이 완벽하게 되살아났다. 그녀는 강현의 손을 조용히 잡았다. 따뜻하고 익숙한 감촉.
강현은 잡힌 손을 내려다보더니, 빙긋 웃으며 하루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왜 그래? 갑자기 분위기 잡고?”
“그냥… 오빠 손이 너무 좋아서.” 하루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며 말했다. 이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는 날이 올까. 현실에서는 영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잊었던 온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듯, 강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시간은 꿈속에서 잔인할 정도로 빠르게 흘러갔다. 함께 수박을 다 먹고, 마당에 나가 배드민턴을 쳤다. 땀을 흘리며 깔깔 웃던 그들의 모습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강현은 여전히 하루를 번쩍 안아 올려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을 쳤다. 하루는 눈을 감고 그의 품에 안겨 마음껏 웃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그 어떤 슬픔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행복과 사랑만이 가득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했다. 하늘은 붉은 노을로 물들었고, 감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강현은 하루의 옆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았다. “하루야, 있잖아. 만약 나중에 내가 없어져도, 너는 항상 웃고 다녀야 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게 들렸다. 그 말은 현실에서 그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실제로 하루에게 했던 마지막 말과 똑같았다.
하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도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무슨 소리야, 오빠는 영원히 내 옆에 있을 거잖아.” 그녀는 애써 밝게 대답하려 했지만, 이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강현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이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아련해 보였다. “그래, 영원히. 네 마음속에서는 항상 그럴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행복해야 해, 하루야.”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노을빛이 강렬하게 번지며 온 세상을 집어삼켰다. 강현의 형체가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비명을 지르며 그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의 몸은 모래처럼 부서져 노을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다시 혼자가 된 듯한 깊은 상실감, 그리고 차가운 절망이 그녀를 덮쳤다.
공허함의 대가
하루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눈에 다시 상점의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눈가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생생했던 강현의 온기가, 목소리가, 웃음이 꿈에서 깨자마자 거짓말처럼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한 공허함이 밀려왔다. 주인장이 경고했던 ‘더 깊은 공허함’이 바로 이것이었다.
“강현 오빠…” 하루는 흐느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꿈속에서는 그토록 행복했는데, 현실로 돌아오니 모든 것이 더욱 처참하게 느껴졌다. 이처럼 비참한 현실에서, 그와의 한때를 잠시 훔쳐 온 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 같았다.
주인장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연민과 함께 삶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되감는 시간의 강은, 과거를 선물하지만, 현재를 더욱 텅 비게 만들지. 네가 그리워하는 과거가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현실의 비극은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하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오열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꿈속에서 받은 위로가 현실의 고통을 더욱 증폭시킬 줄은 몰랐다. ‘차라리 꾸지 말았어야 했을까?’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동시에, 강현의 마지막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작은 행복감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주인장님… 그럼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요?” 하루는 울먹이며 물었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꿈을 통해 다시 만난 강현의 모습은 그녀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과연 나는 그의 마지막 소원대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가?’
주인장은 천천히 카운터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찻잔에서 피어나는 김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지. 그러나 꿈은 때로 진실을 드러내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너는 강현이 남긴 마지막 바람을 다시 들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아니겠느냐?”
하루는 고개를 들었다. 주인장의 말은 그녀의 찢어진 마음에 한 줄기 빛처럼 스며들었다. 그녀는 늘 강현을 잊지 못해 현재를 놓치고 있었다. 그와의 기억 속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들은 그의 마지막 소원은, 그녀가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지침이 될 수 있었다.
“행복해야 해, 하루야.” 강현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단순히 슬픔에 잠기는 것만이 그를 기억하는 방법은 아니었다. 그가 바랐던 대로, 그녀의 삶을 살아가야 했다.
하루는 눈물을 닦았다. 여전히 마음은 아팠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아픔이었다. 절망이 아닌, 어떤 깨달음에서 오는 아픔이었다. “네, 주인장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그녀는 이곳에서 더 이상 ‘되돌리는 꿈’을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꿈은 사라져도, 네 안에 남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주인장은 상점 문을 향해 걸어가는 하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네 다음 꿈을 결정할 것이다.”
밤은 더욱 깊어졌지만, 새벽은 더 이상 멀지 않았다. 하루는 상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그녀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더 이상 온기를 갈구하지 않았다. 강현의 마지막 소원대로 행복하게 살아갈 것. 그것이 그녀가 꿈속에서 얻은 유일하고도 가장 소중한 선물이었다. 그녀는 작은 발걸음으로 어둠 속을 걸어갔다. ‘꿈을 파는 상점’의 불빛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비추고 있었다. 이 상점이 다음에 팔게 될 꿈은, 과연 어떤 색깔일까.
_제1144화 끝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