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묶였던 숨결
산모퉁이를 돌아 흐르는 물줄기처럼, 긴 겨울의 침묵 끝에 찾아온 봄바람은 고요한 암자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어붙었던 계곡물이 해빙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바싹 말랐던 나뭇가지 끝에서는 물 오른 새순이 여린 빛깔을 뽐내며 솟아올랐다. 혜원(惠園)은 낡은 나무 툇마루에 앉아 멀리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비어있는 듯했지만, 그 안에는 만년설처럼 녹지 않는 그리움과 오랜 세월 켜켜이 쌓인 회한이 서려 있었다.
혜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살랑이는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봄바람은 겨울의 차가운 냄새를 씻어내고, 흙냄새와 함께 저 멀리서 피어나는 매화의 향기를 실어 날랐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익숙한, 하지만 동시에 아득히 먼 기억의 조각들이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그것은 그녀가 이 암자골로 숨어든 지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아니, 애써 외면하려 노력했던 그 이름, 지훈(智勳)의 잔영이었다.
혜원은 자신의 삶이 거친 폭풍우를 견뎌낸 낡은 배와 같다고 생각했다. 폭풍이 지나간 후, 간신히 도착한 이 고요한 항구에서 그녀는 파도를 잠재우고 찢겨진 돛을 기우며 평화를 찾아왔다. 하지만 그 평화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심장이 두근거릴 때마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볼 때마다, 혹은 이렇게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잃어버린 것들의 무게가 그녀를 짓눌렀다. 특히, 그녀의 손에서 놓쳐버린 어린 지훈의 마지막 모습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저몄다.
“어머니….”
아직 앳된 목소리였다.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 속에서, 불길에 휩싸인 마을 어귀에서, 지훈은 그렇게 그녀의 손을 놓쳤다. 혜원은 그 기억을 되살릴 때마다, 그날 이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아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려 했지만, 이내 억눌러야 했다. 고통은 침묵 속에 깊어지는 법이었다.
새로운 속삭임
그날 오후, 암자골 어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혜원과 몇몇 은거자들이 전부인 이 적막한 골짜기에 외부인의 발걸음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법이었다. 하지만 오늘, 낡은 갓을 쓰고 다 해진 도포를 걸친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마을의 작은 쉼터에 앉았다. 그는 등에 짊어진 보따리에서 닳아빠진 북 하나를 꺼내 무릎에 올리고 조용히 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야기꾼이었다.
마을의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혜원 또한 우물을 길으러 가는 길에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답지 않게 힘이 있었고, 봄바람이 실어 나르는 매화 향기처럼 은은하게 골짜기 전체로 퍼져나갔다. 혜원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쉼터 쪽으로 돌렸다. 오래된 이야기는 때때로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는 마법 같은 힘을 지녔으니.
이야기꾼은 먼 나라의 전설, 용맹한 영웅들의 모험, 그리고 슬픈 연인들의 사랑을 풀어냈다. 그의 이야기는 생생했고, 듣는 이로 하여금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혜원은 등 뒤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감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슬픔이 잠시나마 잊히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이야기꾼의 목소리가 한 대목에 이르렀을 때, 혜원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어린 소년은 험난한 사막을 건너고, 깎아지른 절벽을 넘어, 마침내 ‘검은 달’의 제국에 다다랐다네. 그의 손에는 어머니가 만들어준, 날개 달린 작은 나무 조각상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고 하더군.”
혜원의 눈이 번쩍 뜨였다. 숨이 멎는 듯했다. 날개 달린 작은 나무 조각상. 그것은 혜원이 어린 지훈에게 직접 깎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재앙이 닥치기 전, 지훈은 언제나 그 조각상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평범한 나무 조각상이었지만, 혜원은 그 뒷면에 몰래 아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던 터였다. 세상에 그 존재를 아는 이는 혜원과 지훈, 단 둘뿐이었다. 아니, 이제는 저 이야기꾼까지 셋이었다.
그는 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그 이야기는 정말 지훈의 이야기일까?
되살아나는 그림자
혜원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시선을 이야기꾼에게 고정했다. 이야기꾼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그 소년이 겪었던 기나긴 고난과, 마침내 ‘검은 달’의 제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소년은 이제 어엿한 청년이 되어, 그곳의 어둠을 밝히는 존재가 되었다고 했다.
혜원은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동시에, 단 한 순간도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가 이야기꾼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혜원은 잠시 망설이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은 이야기꾼의 보따리에 있는 작은 나무 조각들을 향했다. 그녀는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평범한 새 조각이었다.
“이야기… 참으로 감명 깊었습니다. 그런데 방금 말씀하신 그 ‘날개 달린 나무 조각상’은, 어떤 형상이었던가요?”
혜원의 목소리는 애써 태연하려 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깊게 패인 눈으로 혜원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늙었지만 날카로웠고, 마치 혜원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희미하게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그것은… 작은 제비의 형상이었다고 합니다.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듯한 모습이었지요. 그리고 그 뒷면에는… 어린아이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혜원의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비. 지훈이 가장 좋아했던 새였다. 혜원이 깎아준 조각상은 분명 제비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뒷면에 새겨진 이름. 그것은 너무나도 명확한 단서였다. 지훈이었다. 그 소년은 지훈이었다. 살아 있었다. 그녀의 아들이 살아 있었다!
이야기꾼은 혜원의 눈물을 보면서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는 혜원의 손에 들린 나무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자신의 보따리 속에서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낡고 빛바랜, 그러나 분명 제비의 형상을 한 작은 나무 조각상이었다. 그 조각상의 뒷면에는, 작지만 선명하게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智勳’.
혜원의 손이 떨렸다. 세상이 온통 멈춘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조각상을 받아 들었다. 차갑게 식었던 심장이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조각상을 어루만졌다. 십 년이 넘는 세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의 유일한 흔적. 그것이 봄바람을 타고 이렇게 기적처럼 그녀의 손에 쥐여진 것이다.
“아이가… 이 조각상을 어르신께 맡겼나이까?”
혜원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이야기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 척박한 땅에서 만난 적이 있지요.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준 이들에게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의 어머니에게 이 조각상을 전해달라 부탁했지요. 어머님이 살아계시다면, 이 조각상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리라 믿는다고요.”
“아이가… 아이가 저를 찾았단 말입니까?”
“그는 항상 어머니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자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을 겁니다.”
이야기꾼은 잠시 말을 멈추고 혜원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봄바람은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는 법이지요. 이제 그 소식을 따라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새로운 길목에서
혜원은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십 년 넘게 그녀를 짓눌렀던 모든 회한과 슬픔이 한순간에 증발하는 듯했다. 그녀의 아들이 살아 있었다. 그것은 곧 그녀의 삶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고요하고 안전했던 암자골에서의 삶은 더 이상 그녀에게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지훈을 찾아야 했다.
혜원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더 이상 비어있는 공허함이 없었다. 대신, 오랜 침묵을 깨고 솟아오른 맹렬한 의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야기꾼은 혜원의 변화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는 혜원의 손에 들린 제비 조각상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검은 달’의 제국은 험난한 길입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마음은 어떤 길도 마다하지 않을 테지요.”
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은 험할 것이다.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두렵지 않았다. 잃어버렸던 희망을 되찾은 지금, 그녀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봄바람은 여전히 골짜기를 휘감으며 매화 향기를 실어 날랐다. 그러나 이제 그 바람 속에는 지훈의 살아있는 숨결과,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북소리가 함께 울리고 있었다. 혜원은 이야기꾼에게 깊이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길을 알려주십시오. 이 어미가… 반드시 아이에게 가겠습니다.”
이야기꾼은 빙그레 웃으며 먼 서쪽 하늘을 가리켰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온 세상을 물들이는 가운데, 혜원의 그림자는 이제 과거의 어둠을 뒤로하고 새로운 길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긴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